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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인권은 횡단보도다. 도로 곳곳에 있지만, 그 존재의 중요성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횡단보도. 하지만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 위에선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할 공산이 크다. 노인이나, 장애인, 아이들. 횡단보도 없는 도로 위에 섰다간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 선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조례를 통한 인권의 제도화는  우리 사회에 촘촘한 횡단보도를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넘치고, 왜곡에 대응하는 사이 본연의 역할을 놓쳐가는 모습도 보인다. <뉴스민>은 전문가와 인권운동가, 시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횡단보도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인권조례, 횡단보도] ① 인권조례는 인권을 지키고 있을까
[인권조례, 횡단보도] ② 대구·경북 인권조례는 어디까지 왔나?

대구와 경북에서 인권조례에 대한 시민적 관심이 낮지만, 인권 침해 상황이 없기 때문은 아니다. 대구시립희망원 사태나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집단 가혹행위 사건은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낳았고, 디지털 성착취 범죄자의 실체는 경북의 피해 청소년이 성폭력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하지만 지역에서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제도나, 발생 후 수습 매뉴얼이 될 수 있는 제도는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다. 되려 개별 사건이 발생하면 사태를 수습하는 알리바이로 조례 제정이 활용되는 모습도 보인다.

인권조례, 대상 범위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
포괄적 인권기본조례와 영역별 인권조례
대구·경북은 포괄적 인권기본조례 제정도 더뎌

인권조례는 대상 범위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시민 일반의 인권 증진을 도모하는 포괄적 인권조례가 하나고, 다른 하나는 장애인, 여성, 아동, 청소년, 노동자 등 상대적인 인권 취약 집단의 인권 증진을 도모하는 영역별 인권조례다. 통상 전자는 인권기본조례로 명칭하고 후자는 영역과 기능에 따라 개별적인 이름이 따로 붙는다.

인권기본조례(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는 전국적으로 17개 광역지자체가 모두 제정한 상태다. 광주(5개)나, 울산(5개), 충남(15개)은 기초지자체도 모두 조례를 제정했다. 그에 반해 대구와 경북은 기본 조례 제정도 더디다.

대구는 달서구가 2013년 먼저 제정한 후 이듬해 대구시와 중구도 제정했다. 대구시의 경우 2012년 국가인권위의 인권조례 제정 권고를 따르지 않아 시의원이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동구(2017), 남구(2018), 달성군(2019)이 차례로 제정했지만 수성구, 서구, 북구는 여전히 기본조례도 마련하지 않은 상태다.

경북은 상황이 더 뒤쳐진다. 경상북도는 2013년 조례를 제정했지만 산하 23개 기초지자체 중에선 고령, 구미, 문경 외에는 제정한 곳이 없다. 기초지자체의 제정 비율은 13%로 충북(11곳 중 1곳, 9.1%) 다음으로 인권기본조례 제정 현황이 낮다.

김중섭 경상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이러한 현황이 인권 정책에 대한 관심도를 반영한다고 짚는다. 전국의 인권조례 제정 현황을 조사하는 등 경남지역에서 인권조례제정운동을 펼쳐온 김 교수는 “17개 광역단체가 다 조례를 제정했지만 편차는 크다”며 “특히 경북과 대구는 적극적인 편이 아니다. 도농 격차도 큰 편”이라고 살폈다.

이어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정책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인권 침해 상황을) 인권 문제로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한다. 조례는 지자체 차원에서 인권의 법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인데, 지자체는 마땅히 인권 보호와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체”라고 강조했다.

인권조례 제정의 세 가지 양상
상위법 따라 만들어지거나···양성평등, 다문화
관련단체의 적극적인 활동의 반영···장애인
사건·사고로 떠밀리듯 만들기도···경비노동자

김 교수의 설명처럼 지역에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자체는 인권 침해 문제가 발생한 후에야 이를 수습하는 방편으로 조례를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특히 인권 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한 영역별 인권조례에서 이같은 특징은 두드러진다.

인권취약 계층을 대상으로 한 조례는 크게 ▲장애인 ▲청소년 ▲노동 ▲성평등(여성) ▲다문화 등 5개로 영역을 나눠 살펴볼 수 있다. 조례 제정 양상은 3가지 갈래로 나뉜다. 가장 흔한 것은 상위법상 조례 제정이 필요해서 마련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이 양성평등 기본 조례다.

▲대구시를 비롯한 8개 구군 기초자치단체의 장애인, 청소년노동인권, 노동(근로자), 양성평등, 다문화 5개 항목을 기준으로 살펴보니 장애인, 양성평등, 다문화 조례를 모두 제정돼 있었지만 청소년노동인권 조례와 노동(근로자) 조례는 제정된 곳이 3곳에 그쳤다.
▲경북도를 비롯한 23개 시군 기초자치단체의 장애인, 청소년노동인권, 노동(근로자), 양성평등, 다문화 5개 항목을 기준으로 살폈다. 양성평등 조례는 22곳, 다문화 조례 역시 21곳이 있어 그나마 많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장애인(5곳), 청소년 노동(1곳), 노동(근로자)(3곳) 조례는 있는 곳이 적었다.

양성평등기본법은 지자체가 양성평등을 위해 해야 할 의무를 규정하고 구체적인 행위 양태는 조례(양성평등 기본 조례)를 통해 정하도록 했다. 그탓에 대구와 경북에서 경산, 청도를 제외한 29개 기초지자체가 제정 운영 중이다. 다문화 인권조례도 마찬가지다. 다문화가족지원법에 따라 ‘외국인 주민 및 다문화 가족 지원 조례’가 예천, 영양, 문경을 제외한 대구·경북 모든 지자체에서 운영 중이다.

또 다른 갈래는 시민단체나 권익단체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조례가 만들어지는 경우다. 대표적인 사례는 장애인 인권 증진 조례다. 장애인 인권 증진 조례는 상위법에 규정된 경우도 많지만 상위법이 마련되는 과정 역시 장애인 인권단체의 지난한 싸움의 과정이 반영된 결과물이 여럿이다.

대구만 해도 대구시를 포함한 8개 구·군이 장애인 공무원 편의지원, 보조기기 지원 조례, 장애인 문화예술 활동 지원 조례, 자립생활 지원 조례 등 다양한 내용의 장애인 인권 증진을 위한 조례를 제정 운영 중이다. 5월 기준 법제처에서 ‘장애인’을 키워드로 한 조례만 106건 확인된다. 경북도 150건 확인된다.

마지막 갈래는 사건, 사고 발생 후 이를 수습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조례들이다. 대구나 경북의 경우 청소년과 노동 조례 제정에 적극적이지 않다. 흥미로운 점은 노동 일반 인권조례 제정은 쉽지 않지만 특정 직업군에 한정한 인권조례는 여럿 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경비노동자 인권조례가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 대표적인 조례다. 일하는 청소년의 인권 증진 조례나 일하는 사람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동 기본 조례는 없지만 경비노동자 인권조례는 대구 8개 지자체가 모두 제정해 운영하고 있다.

경비노동자 인권조례(공동주택 경비원(노동자) 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는 2020년 5월 서울에서 발생한 경비원 최희석 씨 사망사건 이후 잇따라 제정됐다. 서구, 수성구, 달서구, 달성군이 그해 12월 관련 조례를 제정했고 지난 4월 동구가 제정하면서 모든 지자체가 경비노동자 인권 증진 조례를 갖췄다.

경주시청 트라이애슬론팀 사건 이후엔 경북에서 체육인 인권 증진 조례가 만들어졌다. 경상북도가 2020년 11월 ‘경상북도 스포츠 인권 보호 및 증진에 관한 조례’를 만들었고, 경주시는 2021년 기존의 체육진흥 조례를 전부 개정해서 선수 등 체육인 보호 조항을 신설했다. 해당 조항은 시장이 체육인 인권 보호를 위해 신고센터를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상위법 때문에, 관련 단체의 요구에 밀려, 사건·사고 때문에 조례가 제정되다 보니 많은 경우 조례가 유명무실한 상황에 있다는 점이다. 지자체는 조례를 제정하지만 의무 조항은 가급적 포함시키지 않으려 한다. 임의 조항에 그친 인권 증진의 당위는 지자체장의 의지나 관련 단체의 추가 활동이 없으면 그저 존재하기만 한다. 인권을 구체화하고 제도화하겠다는 애초의 취지와 거리가 멀어지는 것이다.

이상원, 장은미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