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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인권은 횡단보도다. 도로 곳곳에 있지만, 그 존재의 중요성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횡단보도. 하지만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 위에선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할 공산이 크다. 노인이나, 장애인, 아이들. 횡단보도 없는 도로 위에 섰다간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 선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조례를 통한 인권의 제도화는  우리 사회에 촘촘한 횡단보도를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넘치고, 왜곡에 대응하는 사이 본연의 역할을 놓쳐가는 모습도 보인다. <뉴스민>은 전문가와 인권운동가, 시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횡단보도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인권조례, 횡단보도] ① 인권조례는 인권을 지키고 있을까
[인권조례, 횡단보도] ② 대구·경북 인권조례는 어디까지 왔나?
[인권조례, 횡단보도] ③ 복지시설에 갇힌 대구시 인권옴부즈만

4년간 대구시 인권옴부즈만을 지낸 이명주 씨는 들러리로 만들어진 조례의 문제점을 몸소 체험했다. 대구시립희망원 문제가 발생한 후 대구시는 관내 인권사각지대에 대한 인권 보장을 강화하겠다며 복지옴부즈만 규정에 그쳤던 기존 조례를 전부 개정해 인권옴부즈만을 신설했다. 2017년 5월의 일이다.

그해 9월 이명주 씨는 대구시의 첫 인권옴부즈만으로 임용됐다. 부푼 기대를 안고 일을 시작한 이 씨는 조례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대구시가 규정한 ‘인권 사각지대’가 사회복지시설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시 관내 온갖 인권침해 사안이 그에게 알려졌지만, 그가 ‘공식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던 셈이다.

“저는 조례에 의해 선발이 됐고 역할을 했다. 인권옴부즈만이라고 하면 대구 전체에서 일어나는 인권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생각하시더라. 인권옴부즈만이 생겼을 때 많은 분이 기대했고, 관심도 많이 받았다. 전반적인 인권 구제까지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조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이 씨가 깜짝 놀란 조례는 ‘대구광역시 복지 및 인권옴부즈만 설치, 운영에 관한 조례’다. 조례 2조 2항은 “‘대구광역시 인권옴부즈만’이란 시가 사회복지시설 거주자의 인권보장과 증진을 위해 시민에 의한 행정감시 기능을 수행하고자 설치·운영하는 기관 또는 이를 수행하는 자”라고 정의한다. 사회복지시설 거주자로 인권보장 증진 대상을 제한한 것이다.

3조에서는 “대구광역시장은 사회복지사업법 제2조에 따른 사회복지시설 거주자의 인권보장과 증진을 위한 인권옴부즈만을 설치·운영한다”며 법률로 정한 사회복지시설만이 인권옴부즈만의 ‘인권사각지대’임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정의내린다.

아이러니한 것은 대구시 공무원들조차 그 한계를 모르거나 알면서도 그에게 시설 밖의 인권 문제를 들고 왔다는 점이다. 인권 관련 사안만 발생하면 일단 그에게 찾아온 거다. 그럴때마다 이 씨는 난처해하면서도 그것을 시설 안에 묶인 인권옴부즈만을 시설 밖으로 확장하기 위한 근거로 활용하려 했다. 요청 부서에는 공식적인 자문 요청을 하도록 했고, ‘시설 밖 인권사각지대’에 대한 자문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씨는 “검찰청과 회의처럼, 생색 낼 수 있는 자리면 꼭 나를 데리고 갔다. 대구에도 이런 게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며 “그럴때마다 저도 눈치를 보면서도 제 업무가 한정되어 있습니다라고 한마디를 남기곤 했다. 자문 건수가 조례가 정한 시설 관련 업무보다 정량적으로 많아서 조례 개정 근거로 제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초대 대구시 인권옴부즈만을 지낸 이명주 씨는 사회복지시설로 제한된 옴부즈만의 권한을 지적했다.

초대 대구시 인권옴부즈만이 전하는 현실
조례로 정한 인권옴부즈만의 업무 범위
2020년 조례 개정에 나섰지만 무산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는 인권증진조례

이 씨가 말하는 조례 개정은 지난 2020년 개정이 추진됐던 대구광역시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다. 그해 대구시는 사회복지시설에 묶여 있던 인권옴부즈만을 인권보호관으로 바꿔 대구 시민 일반의 인권 침해 문제를 다룰 수 있도록 확대하는 내용을 조례에 담았다. 하지만 조례는 입법예고만 됐을 뿐 의회에 상정조차 되지 못했다. 일부 혐오 단체의 반대 때문이다. 이 일로 대구시 인권증진위원 중 위촉직 위원 전원이 사퇴했다.

이 씨는 “대구에 거주하는 시민이 아니라 사회복지시설에서 생활하는 거주자에게만 역할을 한정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는 게 안타까웠다”며 “인권옴부즈만 역할을 확장하려고 회의도 많이 하고 다른 지자체도 참고하면서 조례를 개정하려고 입법예고까지 했지만 결국 불발됐다”고 설명했다.

대구시 인권옴부즈만 자문위원이기도 한 조성제 대구한의대 교수(경찰행정학과)도 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조 교수는 “대구는 복지시설 구제에 관련된 조직을 갖추고 있지만 대구시 인권 전반에 관련된 구제 기구를 둘 수 있는 근거, 규정이 없다”며 “조례를 만들 때 미처 신경을 못 썼기 때문에 전반적 구제 시스템이 필요함에도 사회복지시설에 제한돼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뉴스민이 만난 조성제 교수, 백경록 위원장, 임미애 경북도의원(왼쪽부터)은 대구·경북의 인권조례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지적했다.

인권보장 및 증진에 관한 조례는 대구에서 서구, 북구, 수성구를 제외한 5개 지자체와 대구시가 함께 제정·운영하는 이른바 인권기본조례이지만, 있으나마나한 유명무실한 조례로 남아있다. 지난해 <뉴스민>이 대구의정참여센터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보면 조례상 필수적으로 ‘인권보장 및 증진 기본계획’을 수립해야 하지만 계획을 수립한 곳은 대구시와 중구 뿐이었고, 인권보장 및 증진위원회도 대구시와 중구만 구성했다.

백경록 의정참여센터 운영위원장은 “법(조례)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실현되게 하느냐도 중요한 문제”라며 “조례를 만들어놓고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인데, 조례가 있는 것보다 제대로 조례에 따라 뭔가를 해야 없는 곳에서도 중요한 조례로 인식할 수 있다. 제대로 실현될 수 있도록 의회가 집행부를 견제하거나 촉구하는 노력이 없다”고 지적했다.

경북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2013년 경상북도가 인권증진조례를 제정했지만 허울 뿐이다. 지난해 9월 인권보호관 도입, 신고센터 설치 등 직장 내 괴롭힘 근절 대책 마련 추진 계획을 밝혔지만, 진척은 없다. 직장 내 괴롭힘 조례는 지난해 11월 제정됐지만 인근증진조례 개정이 필요한 인권보호관 도입은 답보 상태다.

임미애 경북도의원(더불어민주당, 의성1선거구)이 지난 3월 경북 내 행정기관 및 출자출연기관에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차별행위에 대한 조사권을 가진 인권보호관 신설 조례를 발의했지만, 위원회에 상정조차 할 수 없었다.

임 의원은 “인권증진조례에 따르면 담당부서가 있는데, 인권 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전문인력이 아니고 같은 공무원이어서 한계가 있다”며 “관련 전문성과 조사 권한을 갖고 징계 의견을 제출할 수 있어야 해서 인권보호관 제도 도입이 이야기 됐는데 부결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상원, 장은미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