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두레사건’, 42년만에 재심서 무죄 판정

재판부, “피고인들이 겪은 일, 안타깝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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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군 전역 후 경북대학교 대학원 진학을 위해 준비 중 1980년 9월 11일 오후 4시경 경북대학교 후문에 위치한 두레서점에서 사복경찰에 의해 불법 연행돼, 대구시 원대동에 위치한 경북도경 대공분실 안가에 구금됐다. 30여 일간 반국가단체 결성에 대한 조작된 내용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유인물 제작에 대한 수사를 위해 구타, 잠 안 재우기, 발과 다리 고문, 물고문 등 숱한 고문을 당했다’

– 두레사건 피해자 김영석 씨가 당시 사건 기록, 가족의 편지 등을 묶어 출간한 책 <내가 겪은 5.18과 두레사건> 중

5월 18일 대구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이상오)는 계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두레 사건 피해자 5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5명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5·18 민주화 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법원이 재심 개시를 결정한 지 2개월 만이다. (관련 영상=42년 만에 무죄…“대구서도 5.18민주운동 함께했다”(‘22.5.18))

▲5월 18일 계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진 두레 사건 피해자 5명에 대한 재심 재판에서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두레사건은 1980년 5월 계엄군이 광주를 탄압하는 상황을 알게 된 대구 지역 대학생이 두레서점 운영주최인 두레양서조합을 중심으로 모여 이를 알리기 위해 활동하다 불법으로 감금돼 고문을 당한 공안사건이다. 농민, 가톨릭농민회원, 교사, 학생 등 100여 명이 강제 연행됐으며 이 중 14명은 15일 이상 감금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20대 대학생이던 피고인들은 일부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하였다’는 반공법 위반 혐의와 ‘유언비어를 각 날조 또는 유포하였다’는 계엄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1980년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정상용 씨는 징역 2년의 실형이 선고됐으며 다른 피고인들은 징역형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정 씨는 항소했으나 같은 법원이 항소를 기각해 실형을 살았고, 지난 2011년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번 재심 청구에는 정 씨의 처 A 씨가 대신 나섰다.

재판부는 정 씨의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검찰에서도 의미 있는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고, 그 외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죄”라고 밝혔다. 5명 모두에게 적용된 계엄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도 “검찰이 특별히 증거를 제출하지 못했다. 이 사건 계엄포고가 당초부터 위헌·위법하여 무효이므로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에서 규정하는 ‘범죄로 되지 아니하는 때’에 해당한다”고 선고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재판 마지막에 “새로 취임한 대통령이 광주에 가서 기념식을 참석하고 노래도 불렀다고 한다. (대통령이) 아직 살아있는, 현재 진행 중인 역사이며, 앞으로 5월 정신을 지켜나가겠다고 말했다. 그 역사 속에서 피고인들이 겪은 일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항소가 없다면 판결은 확정될 것이다. 형사보상안내문 절차에 따라 신청하면 된다. 만족할 만큼 충분한 금액은 아니겠지만 조금이나마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다. 고생하셨다”고 말했다.

피해자 서원배 씨는 무죄 선고 직후 기자회견에서 “42년 만에, 특히 5월 18일에 무죄를 선고 받은 것에 의미가 크다. 광주의 아픔을 대구에서도 함께 하려 했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며 ”당시 100여 명 이상 붙잡혀 고문을 당했다. 아마 광주를 제외하고 단일 사건으로는 가장 유공자 수가 많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바라는 점에 대해 묻자 서 씨는 “5·18 유공자로서 대구경북에서 살아가는 건 떳떳하지 못한 삶이었다. 이때까지 5·18 유공자라고 이야기해본 적도 거의 없다. 앞으론 이런 세상이 좀 바뀌고 대구경북에서도 광주의 슬픔을 이해하고 사랑해주길 바란다”며 “당시 광주가 아닌 대구에서 비슷한 일이 있었어도 2.28의 정신으로 똑같이 항쟁했을 거다. 5·18 광주의 교훈을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답했다.

같은 사건 피해자로 서울고등법원에서 지난 12일 무죄를 선고 받은 김영석 씨는 “42년 전 여기 모두 20대였다.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한 일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다만 폐쇄된 지역사회에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오랜 시간 고통받은 세월이 있었다”며 “무죄 판정을 받고 나니 자식들이 가장 좋아했다. 여생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인생을 되찾고 남은 시간 즐거울 수 있는 계기가 돼서 감사하다”고 전했다.

김보현 기자
bh@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