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규관의 김수영-되기] (10) 눈

17:50

요 시인
이제 저항시는
방해로소이다
이제 영원히
방해로소이다
저 펄 펄
내리는
눈송이를 보시오
저 산허리를
돌아서
너무나도 좋아서
하늘을
묶는
허리띠모양으로
맴을 도는
눈송이를 보시오

요 시인
용감한 시인
―소용없소이다
산 너머 민중이라고
산 너머 민중이라고
하여둡시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웃음이 나오더라도
눈 내리는 날에는
손을 묶고 가만히
앉아 계시오
서울서
의정부로
뚫린
국도에
눈 내리는 날에는
<빽>차도
지프차도
파발이 다 된
시골버스도
맥을 못 추고
맴을 도는 판이니
답답하더라도
답답하더라도
요 시인
가만히 계시오
민중은 영원히 앞서 있소이다
요 시인
용감한 시인
그대의 저항은 무용(無用)
저항시는 더욱 무용
막대한
방해로소이다
까딱 마시오 손 하나 몸 하나
까딱 마시오
눈 오는 것만 지키고 계시오……

글에서 인용한 ‘눈’은 <김수영 전집 1(시)>에 수록됐습니다.

이 시는 전집에 1961년 1월 3일에 탈고된 것으로 적혀 있다. 시에 임하는 김수영의 자세를 감안해 보건데, 아마도 1960년 12월(혹은 그 전에) 즈음에 이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싶다. 한겨울이다. 한겨울에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찬바람과 눈송이뿐이다. 김수영은 이미 1960년에 일어난 4·19혁명이 타락해 가는 과정에 맞서 끊임없이 피로와 무기력과 싸워야 했다. 1960년 가을에 쓴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에서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은 곧 “사랑이 추방을 당하는 시간”이라고 썼다. 따라서 「피곤한 하루의 나머지 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대에 쓴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라고 말한 건 어떤 안간힘이라고 해석해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이 시에서 드러난 정황은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빽>차도/지프차도/파발이 다 된/시골버스도/맥을 못 추고/맴을 도는” 어느 “눈 내리는 날”이다. 이 무용한 순간에 시인은 자신을 급습한 어떤 예지를 받아 적는다. 확실히 4·19혁명과 5·16쿠데타는 김수영의 정치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긴 게 분명하다. 혁명과 혁명 이후, 그리고 쿠데타 이후에 김수영의 내면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요동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지만 김수영은 이런 현실의 격랑을 절대 시와 무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수영만큼 그러한 격랑을 “온몸”으로 건너간 시인이 또 있었던가. 아무튼, 이 시를 쓸 당시는 혁명이 천천히 타락해 가는 과정 중이었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한때 “저항시”를 썼던 김수영이 “이제 저항시는/방해로소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혁명으로 인한 ‘잃어버린 예술성’을 회오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문학작품에서 예술성과 정치성을 구분지으려는 거의 필사적인 무의식은 지금도 여전한 현상인데, 김수영의 경우를 말할 것 같으면, 정치성과 예술성이 변증법적으로 복잡화되는 과정에 김수영 시의 에너지가 있다. 그는 언제나 묻고 묻고, 또 물었다. 부단히 그 물음을 밀고 나간 건 정말 경의에 가깝다 할 것이다.

“이제 저항시는/방해”인 것은 “저항시”가 그 물음에 대한 최종적인 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답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다. 그리고 그 답은 언제나 현실적 조건 속에서 도출되는 것이지 물음 자체가 곧바로 특정 답을 목적의식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하면 물음이 답으로 화한다는 관념들은 오류다. 물음은 답을 요청하면서 답을 도출시키는 현실적 조건들만 만들고는 다른 물음으로 변신한다는 게 더 사실에 가깝다. 이것이 물음과 답의 변증법이며, 답이 물음을 배신하는 역사적 사례가 탄생하는 바탕이 된다.

혁명이 타락해가는 과정을 목도하면서, 김수영의 영혼에 번개처럼 흔적을 남긴 것은 ‘민중’이다. 그리고 ‘사랑’은 김수영의 민중-되기의 방법론이었다. 김수영을 자유와 사랑의 시인으로 호명할 때, 그 자유와 사랑을 가능케 했던 현실적 조건들에 대해서는 곧잘 입을 다물지만, 김수영이 발견한 ‘자유와 사랑’은 김수영 자신의 물음에 대한 어떤 답이고 ‘민중’은 ‘자유와 사랑’을 조건 짓는 현실적 조건이다.

한편으로는 혁명의 타락 속에서 그가 무기력과 혁명의 불가능성을 절감하고 있을 때 이 시가 탄생했을지 모른다. 그에게 ‘민중’은 아직 “산 너머 민중”이기 때문이며, 그 “산 너머 민중”은 마치 먼 하늘에서 치는 번개처럼 비형상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가 “하여 둡시다”라고 다소간 임의적으로 말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 행에 “민중은 영원히 앞서있소이다”라고 하는데, 이쯤 되면 “민중”은 선험적인 존재가 되는 것일까? 하지만 김수영의 언어가 평생 동안 삶의 구체적 상황 속에서 발현된 것을 감안하면 이 시에서 “민중”은 선험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김수영이 천천히 느끼고 있는 현실의 민중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눈 내리는 날에는/손을 묶고/가만히 앉아 계시오”는 섣부른 관념적 판단을 배제하려는,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민중’이라는 존재에 대한 감각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민중은 영원히 앞서있소이다”가 두 번 반복되는 것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이것은 4·19 혁명 후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신문하고/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쓰는 말밖에는 아니 되”는(육법전서와 혁명) 현실을 그가 뼈저리게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까딱 마시오 손 하나 몸 하나/까딱 마시오/눈 오는 것만 지키고 계시오”는 자신의 뼈다귀 같은 혁명에 대한 관념을 비우려는 자기다짐이기도 하다.

이런 해석은 같은 해 같은 달에 탈고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는 「쌀난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이 시에서 김수영은, “대구에서/대구에서/쌀난리가/났지 않아/이만 하면 아직도/혁명은/살아 있는 셈이지//백성들이/머리가 있어 산다든가/그처럼 나도/머리가 다 비어도/인제는 산단다/착실하게/온몸으로 살지/발톱 끝부터로의/하극상이란다”며, 대구에서 일어난 “쌀난리”를 통해 몸으로 사는 민중의 삶에 자신을 연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따지고 보면, 김수영의 ‘온몸의 시학’은 복잡한 관념의 소산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민중을 발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시의 원리이다.

5·16쿠데타 이후 찾아온 심리적인 불안과 침잠을 막 빠져나와서 쓴 시들에는 바로 몸에 대한 감각과 사유가 울리고 있다. 「먼 곳에서부터」, 「아픈 몸이」, 「시」를 읽어보면 그것은 명백하다. 몸으로 사는 존재는 현실 세계의 운동 때문에 아플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의 아픔은 마음의 아픔이기 전에 몸의 아픔이다. 그리고 그 몸의 아픔을 떨치는 방법은 “일을” 하는 것이다. 물론 김수영에게 “일”은 생활이면서 존재의 혁신을 향한 “무한한 연습”(이상 「시」)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나는 이런 김수영의 그치지 않는 민중-되기가 「거대한 뿌리」에 이르렀다고 믿으며, 민중-되기의 과정을 통한 숱한 의미화를 통과한 무의미시 「풀」이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고 믿는 쪽이다.

여기에 소개한 「눈」은 “저 펄 펄/내리는/눈송이”로 형상화된 “민중” 앞에서 그의 영혼과 시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답답하더라도” 가끔은 “저항” 대신 다른 시간을 가질 필요가 우리에게는 있다. 시는 더더욱 그렇다. 이렇게 현실과 시는 뗄 수도 없고 떼어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한 몸이면서 다른 몸인 것이다.

“작품 전문은 저작권자와 협의하에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