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성리엄니열전] (2) “우리는 병사처럼 누워서 수요 집회를 기다린다” /김성경

“사드 오기만 와라, 그 앞에 구불러뿐다” 장경순(85)

14:38

[편집자 주=성주 글쓰기 모임 <다정>은 소성리 ‘엄니(어머니의 사투리)’를 만나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 철회 투쟁 최전선에서 선 소성리 엄니들의 생애를 더듬으며 이 시대 평화를 생각해 봅니다. <다정> 회원들이 쓴 글을 부정기적으로 <뉴스민>에 연재합니다.]

“사드 오기만 와라, 그 앞에 구불러뿐다” 장경순(85)

김성경(다정 글쓰기 모임, <다정> 회원)

소성리 가는 길, 벚꽃 잎은 봄 처녀 저고리 자락 날리듯 팔랑거렸다. 마을 회관에 가까워지는 내 마음은 쇄빙선 같다. 할머니들 언 마음을 잘 다스려서 길을 내드려야 한다.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롯데 골프장 앞으로 행진 하는 장경순 할머니. [사진=김성경]
“할머니, 소성리에 언제부터 사셨어요?”
“이 처자는 한글 선생이가? 책은 먼저 번에 받아놨지. 아니네, 이 처자는 우리 패션쇼 할 때 흰 옷 입고 왔다 갔다 하던 사람이네. 한 밤중에 흰 옷 입고 왔다 갔다 했으니 분간이 안 되지. 하하하.”

할머니들이 웃으니 나도 마음이 금세 더워졌다. 나는 할머니의 무릎 가까이 닻을 내렸다. 고향을 둘러보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초전 면소재지에 살았지만, ‘소성리’라는 마을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게 30년이 지나 알게 된 성주 골짜기, 소성리는 이제 ‘사드 제3부지’로 불린다.

열여덟에 시집와 평생을 ‘어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며’ 착하게 살아온 85세 장경순 할머니와 얘기를 나눴다.

“중신애비 말만 듣고
선산서 배도 타고, 한참 걸어 시집 왔어.
신랑이 갓을 씌고 왔는데
얼굴이 하도 길따래서 이만큼이나 되더라. (팔을 사정없이 벌림)
나는 동글동글한데
낯이 길쭉한데다가 갓을 씌니 무섭기까지 하더라. (웃음)
어머님, 시동생 맘씨가 다 좋았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고, 길쌈 배우고, 베도 짰지.
근데, 우리 신랑은 재미가 없었어.
우리는 다정시럽게 얼굴 마주보면 안 된다 해서
잠도 한 방에서 같이 잤어.
우리 땐 다들 그러고 살았지.
친정도 엄마, 아부지 돌아가시고 딱 두 번 가고,
남동생 결혼한다 해서 가려고 했더니 못 가게 하대.
부아(화)가 나서, 혼자서 대구에 있는 예식장엘 가는데,
‘가’자 뒷대가리도 몰랐지만 잘만 찾아가지대.
영감이 일찍, 오십 안 되서 병이 들었어.
천만지침(기침)을 하니까
농사도 내 혼자 짓고
소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소한마리 팔아가 공부 시키고, 또 키워서 팔았지.
아들은 봉소국민학교, 성주 중학교 나와서 대구로 공부하러 갔어.
아들 셋, 딸 둘.
손주들도 아홉이나 있어.
군대도 여섯이 ‘‘할매 잘 갔다오께’’ 하고 갔어.
장관들 자식들은 군대 안보내도 우리 자식들은 안 보낼 수 있나.
짐승은 안 키웠어. 정만 들지. 짐승이 없어야 편해. 나 편할라고.”

▲장경순 할머니. [사진=김성경]

“사는 게 힘들었어. 없어서 고생도 많이 했지.
배가 고파서 글자가 안 보이더라.
밥하고 날된장 싸가니까 배부르니 글자가 보이더라.
남들은 소풍가면 밤이라도 삶아 주더만.
식은 밥 한 주먹에 된장 국물 부으니깐 줄줄 흐른 적도 있어.
떨어진 밥에 흙이 묻어도 주워 먹었지.
고구마도 큰 건 남자라고 오빠 주고,
난 여자라고 작은 거 주고.”

▲할머니들과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점심밥을 해먹다. [사진=김성경]

“자식 얘기 해 줄테니 들어봐.
돌이는 남의 집 나무삐까리 쌓아놓은 데 불내고
‘돌캉다리’ 밑에서 안 죽을라고 숨어 있었지.
갸가 오십 넷인가, 우리 돌이가 몇 살이여?
아, 오십 다섯.
종강이는 돌이가 소 갖다 놓는 동안
물에 빠져 건져냈는데 하루 만에 살아났어.
업고가다 자빠지고 택시타고 병원에 갔지.
애 낳은 어떤 여자가 바늘로 살려줬어.
그 종강이는 지금 수의사 됐어.
돌이도 까불까뿔 댕기더니 부지런해서 지금은 잘 살아.”

“시집오고 다음해에 6. 25 난리가 났는데,
보따리가 없어서 세간을 광목치마에 싸서 피난을 개울 방구 밑으로 갔어.
시누랑(이호기 할머니) 같이 ‘반도깨이(소꿉놀이)’ 살고 있으니
인민군들이 머리 땋은 처자한테는 말도 걸고 그랬어.
사드 이거에 비하면 덜 지겹더라.
난리도 그런 난리라면 차라리 괜찮지 않았나 싶어.”

장경순 할머니는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얼라 할매‘에 속한다. 전화벨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서 먼저 받고 유모차도 앞서서 민다.

▲수요집회를 기다리며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쉬고 있는 할머니들. [사진=김성경]
“우리 딸이 엄마 이제 어간해서 나서지 마라, 해서 내가 뭐랬는지 아나? 사드 오기만 와라, 그 앞에 구불러뿐다, 이랬지.”

구부른다, 구른다의 경상도 사투리인데
먹먹하게 들렸다.

“할머니, 여기서 이사 가야하면 어디 가서 사실래요?”
“우리는 여기서 죽을 거야. 이 방 사람들 맘이 다 그래.”

구십 넘은 할머니들이 촛불에 나와 평화를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라.

열여덟부터 살아온 땅,
열아홉부터 살아온 땅,
남편 따라 찾아온 땅,
남편 보내고, 자식을 기다리는 땅.

60년, 70년을 소성리에서 살아온 할머니들이 모여 점심밥을 해먹는다.
2시에 열리는 수요 집회를 기다리며, 병사처럼 누워 있다.
그냥 이 평화로운 마을에 놀러온 것이라면 좋겠다.
이 땅에 사드가 사라지면,
‘평화’라는 단어를 외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소성리의 오후였다.
노란 민들레꽃들이 하품을 하는 따뜻한 봄날 오후였다.

▲소성리 마을회관 앞에서 시집 <성주가 평화다>를 판매하고 있는 글쓴이. [사진=김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