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형철의 멋진 신세계?] 인공지능과 경쟁하라? 창의·융합·협업 교육의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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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 수요일마다 ‘정형철의 멋진 신세계?’를 연재합니다. 브레이크 없는 테크놀로지의 폭주는 우리의 삶을 뿌리째 바꾸고 있습니다. 미래가 현재에 들어와 있고, SF가 현실이 되어버린 세상. 기술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속에서 대안과 전환을 모색해 봅니다. ]

인공지능 시대, 교육의 역설

‘4차 산업혁명’으로 세상이 요란하다. 실체의 유무, 현상의 본질적 의미에 관한 논란을 뒤로하고 이슈의 파급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가히 혁명적이긴 하다. 쏟아지는 관련 뉴스와 출판물을 보고 있노라면, 새로운 산업혁명은 이미 우리 삶에 깊게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추세에 맞추어 교육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아우성이다. 혁명이라고 하면 성에 안 차는 듯, ‘교육대혁명’이라고까지 이름 지어 부른다. 공영 교육방송 EBS는 얼마 전, <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대혁명>이라는 방송을 내보냈다.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해 사회 전반에 걸쳐 교육대혁명이 필요하다는 내용이다. 기존 교육시스템으로는 미래사회를 준비할 수 없으며 교육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없다면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내놓고 있다. 결국 교육혁명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융합적 인재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EBS, <4차 산업혁명 시대 교육대혁명>

사실 이러한 변화를 요구하는 일은 그다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조금 거칠게 말한다면, 지금 우리교육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근대교육 시스템은, 본래 산업사회에 동원될 인력자원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기술 발전과 산업 시스템 변화는 시기마다 그에 합당한 새로운 교육을 필요로 했으며, 제도화된 근대교육은 지금껏 이러한 요구에 비교적 충실히 부응해 왔다. 지금 이야기가 나오는 ‘교육대혁명’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기존 관습을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인공지능과 경쟁하라?

“인공지능과 경쟁할 우리 아이, 이대로 괜찮습니까?”
“인공지능과 경쟁하며 살아야 할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
“인공지능과 경쟁할 첫 세대, 청소년을 위한 미래교육은 뇌교육”
“인공지능 극복할 창의적 인간 교육 필요해”

최근 교육 관련 기사나 글의 제목들이다. “인공지능과 경쟁하라!”가 이 시대 교육의 정언명령이 됐다. 그리 오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 있는 ‘정보화 시대’라는 슬로건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제는 ‘인공지능 시대’라는 말이 모든 교육적 논의의 말머리로 붙어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이 하는 말들은 거의 비슷하다. 미래사회를 대비한 우리교육의 준비가 부족하다는 전제가 깔렸다. 인공지능과 경쟁해야 하는 시대인데, 우리 교육은 한참 뒤처져 있다는 것이다. 주요 원인으로, 새로운 시대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낙후한 교육시스템이 거론된다. 주입식 교육방식, 지식 습득 위주의 교육내용, 객관식 답 고르기 평가제도, 교육문제의 블랙홀인 대학입시제도가 대표적인 사례로 지목된다. 대부분 오래전부터 우리 교육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된 사안들이다. 새로울 것도 없고, 식상하기까지 한 이러한 비판이 인공지능 시대를 맞아 우리교육이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혁명에 가까운 개선 없이는 살 길이 없다는 비장함과 함께.

그러나 이들의 관심은 교육 바깥에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교육받는 사람이 아니라, 교육의 결과물로서 만들어지는 사람에 있다. 인공지능이나 로봇과 경쟁해서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 새로운 첨단 기술산업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어 부의 창출에 기여하는 사람, 더 높은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효율과 생산성이 높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근대교육이 줄곧 그래왔던 것처럼 교육의 결과가 ‘쓸모’ 있음과 없음으로 구분되고, 교육의 성패를 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여기서 ‘쓸모’란 기술산업사회 시스템에 효용가치가 있다는 의미에서의 ‘쓸모’이다. ‘쓸모’의 대표적인 보상은 자격증이나 합격증이다. 이러한 ‘쓸모’의 자격을 인증받기 위해, 우리는 그토록 오랫동안 ‘쓸모’ 없는 시간을 학교교육에 갖다 바친다.

‘쓸모’는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도화된 표준과 관습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다. ‘쓸모’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쓸모’를 요구받거나 낙오하게 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앞으로는 인공지능과의 경쟁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쓸모’ 없는 존재로 전락할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새로운 ‘교육대혁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기존과 다른 방식의 교육을 고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것, 인공지능이 어려워하는 것, 인공지능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의성, 융합성, 협업 능력 그리고 교육의 역설

인공지능과 본격적으로 공존하고 경쟁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은 창의, 융합, 협업 능력이라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창의성이나 융합성, 협업 능력은 기계적 사고, 행위와는 상반된 특성이다. 고도로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능력이 역설적이게도 비기계적인 사고와 능력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능력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더라도 이러한 능력을 기르기 위한 교육이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가령 우리는 “창의성은 어떻게 길러지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답하지 못한다. 창의성 교육이라며 숱하게 진행된 교육이 정말 창의성과 관련이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 이전에 도대체 인간의 창의성이란 무엇이며, 정말 창의성이 아주 중요한 특성과 능력인지에 대해서도 확신하기 힘들다.

허핑턴포스트에 실린 <창의적인 사람들의 습관 18가지>(2014. 3. 14)라는 기사를 보면 창의성이라는 것은 신비롭고도 역설적인 방식을 거쳐야 생긴다고 한다. 기사에 실린 창의적인 사람들이 갖는 습관 중 일부를 살펴보면, “몽상에 잘 빠진다거나, 자신에게 맞는 시간대에 일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갖거나, 고통을 승화하고, 새로운 것에 항상 열려 있으며,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 많고, 위험을 감수할 줄 알고, 자신만의 생각에 갇히지 않고, 변화를 즐기며, 명상할 줄 안다”는 것이다. 기사 내용이 절대적일 수 없지만, 이 사례만 보더라도 창의성을 기르기 위해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 쉽사리 실감할 수가 없다.

융합교육은 지금도 일선 교육현장에서 STEAM(Science, Technology, Engineering, Arts & Mathmatics)교육으로 불리며 실행되고 있는 교육과정 및 방법이다.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이라는 최근 유행하는 교육목표에 가장 부합하는 교육방법으로 알려져 있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통합교육과정이라고 보면 된다. 융합적 사고는 기계적이고 분리적인 사고방식과 상반되는 능력이다. 기계적 세계관이나 방법론과 대척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첨단 기계가 일상을 지배하는 기술사회는 우리의 융합적 능력에 가장 위협적인 조건이 된다. 문제는 기계화된 사회로 치달아가면서 정작 이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자질로 융합적 능력을 꼽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태생적으로 주어진 융합적인 자질을, 인위적인 제도와 규율, 혹은 교육으로 갉아먹은 이후에 다시 복원하고자 하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은 일이다.

분명한 것은 새로운 교육이 추구하는 협업 능력이란, 자발적이고 호혜적인 협력과 분명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교육을 통해서 협업 능력을 키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마치 ‘놀이교육’을 통해 ‘노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놀이교육’을 충실히 수행했던 어떤 선생님은 한 아이에게서 “선생님, 우리 이제 놀아도 돼요?”라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놀이교육’은 받았지만 결국 놀지는 못한 것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은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협업 능력 교육’이라고 프로그램화하는 순간 협업 능력 교육은 사라지고 협업을 위한 ‘거래’로 왜곡될 것이다.

자유인이 되기 위한 교육

교육을 바라보는 오랜 시선 중 하나는, 사람을 자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적자원’이라는 말은 끔찍한 언어 테러다. 인재라는 말도 그렇다. 모두 ‘쓸모’와 ‘효용’에만 맹목적으로 집착한 언어다. 사람이 자원이라면 투자 대비 효율을 따지게 된다. 인간이 얼마나 고매한 존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공산품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시대에 맞는 인재상이란, 대체로 그 사회에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인간 유형을 미리 측량하고 모델링하여 프로그램화하는 것이다. ‘인공지능 시대에 필요한 인재’라는 말도 같다. (무엇을 지칭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창의적이고 융합적이며 협업 능력을 갖추고 궁극적으로 기술사회의 물질적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이 ‘교육대혁명’을 통해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인재상이다. 이러한 인재상은 곧바로 교육 현장의 목표와 지향이 되어 끊임없이 인간을 도구화할 것이다.

삶의 영역을 생산(노동)과 소비, 즉 경제활동으로만 국한해서 사고하는 방식이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지배적으로 뿌리내렸다. 그 결과 자유롭고 활기 넘치는 인간 활동은 극도로 위축됐다. 이러한 근대자본주의적 인간관인, 호모 오이코노미쿠스(homo oeconomicus, 경제적 인간)의 특성이 극단적으로 관철되는 분야가 바로 교육 영역이다.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성장 이데올로기는 교육 전 과정을 지배해 왔다. 교육을 통한 ‘자유 시민으로서의 성숙’과 같은 소망은 끼어들 틈이 없다. 오로지 호모 오이코노미쿠스의 질주만이 계속될 뿐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소비지상주의 사회에 투항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두고, ‘자기주도적 노예화’라고 칭했다. 우리는 언제쯤 자기주도적 노예화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교육이 지속된다면 벗어날 가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대혁명’이 필요하다는 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개량이나 혁신이 아니라 근본을 바꾸는 혁명이 필요하다. 다만 그 혁명은 인공지능보다 우월한 인간을 만들기 위한 길이 아니라, 자율적 삶을 통해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숙해 가는 사람을 위한 길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