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곤궁한 근대정치의 맥거핀, ‘난민’ /김민하

10:34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난민 반대 집회’가 열렸다. 약 1,000명(경찰 추산 700명)이 모였다고 한다. 그 옆에선 ‘난민 반대에 반대하는 집회’도 열렸는데 규모가 크진 않았던 것 같다. 재특회에 맞서는 카운터스라는 일본의 구도가 재현된 것일까?

인터넷에선 무슬림에 대한 악의적 왜곡과 침소봉대가 판을 치고 있다. 이들의 표현에 의하면 무슬림들은 인간적 도의로서는 도저히 인정해줄 수 없는 기괴한 문화적 양식을 갖고 있으며 일상 자체가 테러로 대표되는 폭력으로 물들어 있다.

이슬람 문화를 이러한 전형에 가두는 논리적 기초를 유포하는 한 축은 보수 기독교일 것이다. 기독교는 과거부터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내세우며 이슬람의 ‘이’를 말하는 것조차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여 왔다. ‘전도’와 직접 관계가 없던 수쿠크채권법(이슬람 채권에 면세 혜택을 주는 조세제한특례법) 도입을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자 유명 목사가 ‘대통령 하야’를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기독교의 이런 태도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배경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첫 번째는 남을 괴물로 만드는 것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찾는 전형적 행태, 즉 ‘마녀프레임’이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은 기독교가 스스로의 조직적 이해를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혐오를 재생산하고 있다는 주장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는 경향신문에 쓴 칼럼([사유와 성찰]동성애 혐오동맹과 교회 부채, 2016.6.17)에서 개신교의 재정적 위기에 대한 해결책 중 하나로 혐오동맹의 강화가 고안되었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김진호 실장은 이 글에서 “최근 한국 개신교 극우주의자들, 특히 정당 추진론자들이 반동성애를 부르짖는 진짜 이유는 미국에서 정치세력화를 꾀했던 신복음주의자들을 따라한 데 있다”고도 지적했는데, 이 대목이 기독교가 이슬람을 마녀사냥 하는 두 번째 배경이라고 볼 수 있다. 좀 더 논의를 정돈해보자면 이 문제는 한국 기독교가 단지 미국 모델을 따라한다는 것보다는 미국식 개신교 탄생 그 자체와 연관이 있다.

구세계와 단절하고 대의민주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등을 급진적 방식으로 사회 구성 원리로서 관철하려는 사람들이 만든 미국이라는 공간에 적응하기 위해, 기독교는 복음주의라는 형식을 선택해야 했다.

복음주의는 영국 국교회의 이론과 체계적 권위를 배격하기 위해 누구나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논리를 고안해냈다. 미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일찍이 <미국의 반지성주의>에서 미국 기독교의 복음주의가 표출하는 반지성적 행태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대중의 목소리와 능력만 있다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기업가 정신이 교차하며 계몽과 진보에 맞서는 풍경과 함께 살폈다.

사실 지난 주말 난민 반대 집회는 리처드 호프스태터가 미국 근대사를 통해 본 바로 그 상황의 반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 기독교가 제공한 이슬람 혐오의 논리를 언급했지만, 집회 참가자들이 앞세운 대다수의 슬로건은 다소 결이 달랐다. 주로 등장한 구호는 “가짜 난민 특혜 반대”, “국민이 먼저다”였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제기된 ‘인종차별론자’라는 비판을 의식한 듯 혐오가 아니라 안전을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광화문에서 열린 ‘예멘 난민’ 반대 집회. [사진=JTBC 뉴스 갈무리]

조선일보에 의하면 난민 반대 집회 주최자는 “우린 진보도 보수도 아니고, 인종 혐오자는 더더욱 아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한겨레 주말판에도 비슷한 취지의 글이 실렸다. 백인 남성이어도 여성이 불안감을 느끼는 건 마찬가지니 특별히 예멘인을 차별적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는 얘기였다. 공정함을 요구하는 시대에는 인종주의마저도 공정해야 한다.

이들의 논리에서 촛불시위의 슬로건과 비슷한 형식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촛불시위에도 “나는 진보도 아니고 보수도 아니지만”으로 주장을 시작하는 ‘평범한 시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공적 지위를 이용해 100% 대한민국이나 경제민주화 등의 사탕발림을 내세워 국민을 속이고, 최순실 씨와 함께 사리사욕을 채우느라 세월호 참사와 같은 안전문제를 외면하고, 특히 정유라 씨에게 ‘특혜’를 준 것에 분노했다. 이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는 천하에 다시없을 세계 최악의 기괴한 인간들로 표현됐다.

뭔가 난민에 반대한다는 사람들의 세계관은 마치 이것의 열화버전 같다. 국가가 인권이나 세계평화와 같은 하등 쓸데가 없는 이상에 매달려 난민들에게 ‘특혜’를 주느라 정작 국민의 재산과 안전에는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세계관은 최근에 문제가 된 여러 사례를 통해서도 반복해서 드러나고 있다.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서는 안 된다며 정규직 입사자와 똑같은 채용 절차를 거치게 해달라거나, 수능 정시 확대와 학생부종합전형 폐지로 공정한 경쟁을 가능하게 만들어 달라는 요구 등이 그렇다.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돈을 번 기성세대가 거짓 명분을 동원해 암호화폐 투자를 제한하고 있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기만적인 기득권에 대한 분노와 이로 인한 냉소적 세계관의 일반화,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대안이 아닌 것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으로 이에 호응하는 기득권의 전략은 계속 반복되어 왔다.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시장원리의 확대나 사회적 퇴행으로 대체되기 일쑤였다. 신자유주의는 오늘날 기득권의 대표상품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뉴딜식 나눠먹기를 타파하는 저항의 한 형태로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는 일본에서 자민당식 이익분배 정치에 대한 개혁을, 한국에서는 박정희 패러다임에 대한 대안을 자처했다.

촛불시위와 ‘난민 반대’가 같다는 말을 하려는 게 전혀 아니다. 이 두 사건을 분리하기 위해서는 근본적 차원의 문제를 직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얘기다. 대의민주주의 시대의 정치는 민주주의와 시장원리를 동일시하고 이 토대 위에서만 자유주의적 가치를 수호할 수 있다는 기만적 전제를 거부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은 해를 거듭할수록 세계적 차원에서 심화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난민’은 체제의 맥거핀(영화 등의 줄거리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을 마치 중요한 것처럼 위장해서 관객의 주의를 끄는 일종의 트릭)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퇴행적 근본주의와 대중의 공정성에 대한 희구가 한 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맥거핀이 퇴장하고 난 뒤에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근대정치의 곤궁함 그 자체이다. 그래서 이 문제의 해결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난민에 속한 어느 불행한 개인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에서 멈출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