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결과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 강우진

13:58

한국 사회의 화두는 공정성 이슈라는 데에 대부분의 사람이 생각을 같이 할 것이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정치의 영역에서 넘쳐나는 수많은 공정성 담론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하지만 무엇이 공정성인지 또한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에 대한 열린 토론조차 충분치 않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한국은 여전히 동질적인 사회이지만 한국의 갈등 수준은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한국 사회 공정성 논쟁에서 나타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매우 복합적인 성격을 가진 서로 다른 공정성이 다층적인 수준에서 충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은퇴를 맞이하고 있는 베이비붐 세대가 주역으로 활동하던 시절 한국 사회는 높은 성장을 기록하며 사회적 이동성이 높은 열린 사회였다. 하지만 베이비붐 세대의 자식 세대인 에코 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는 이 시점에서 한국 사회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한국 사회는 본격적인 저성장의 시대에 진입하였다. 더구나 한국은 가장 빠르게 고령화되는 사회이면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기록하는 사회가 되었다. 한국은 저성장, 저출산, 초고령화의 삼각파도를 함께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가장 성공적인 민주화의 사례로 꼽히는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취약하다. 불평등 해소와 공정성의 제도화라는 시민 요구가 정책적 결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병목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가장 성공적이라 평가되는 한국의 민주화 30년은 권력의 교체방식을 제도화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민주주의가 사적인 영역의 갈등을 민주적 정치과정을 통해서 제도화는 체제라고 할 때 한국 민주주의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에 이어 2017년 취임식에서도 “기회는 공평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은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수락 연설에서 “기회는 공평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고 했다. 이 구호는 광장의 촛불이 모여 부패한 권력자를 몰아내고 치러졌던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집권한 문재인 정부를 대표하는 슬로건이 되었다. 이 구호는 문재인 정부에 대한지지 여부와 관계없이 많은 사람에게 울림을 주었다.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과정 그리고 정의로운 결과는 한국 사회의 가장 중요한 화두로 부상한 공정성을 관통하는 중요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 슬로건의 감성적인 호소력에도 불구하고 좀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에서 기회가 평등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가? 과정이 공정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평등한 기회가 기계적으로 적용되면 그리고 과정에 두드러진 외부요인이 없으면 결과는 모두 정의로운 것인가? 출발선이 같다고 하더라도 출발선에 선 개인의 조건이 처음부터 기울어져 있다면 결과는 공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하는 경주자가 한 사람은 맨발로 출발하고 다른 한 사람은 최고의 기술로 만든 런닝화를 신고 뛴다면 경쟁의 결과는 상당 부분 이미 결정되어 있다. 이 경우 개인 조건의 차이를 불가피한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문제는 개인의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배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자질과 능력은 우연적이라는 것이다. 롤스가 정의론(1971)에서 주장한 것처럼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자의적인 운(luck)이 분배의 몫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라고 볼 수 없다. 이에 따라서 롤스는 공정성의 두 번째 원칙으로서 차등의 원칙(difference principle)을 제시했다. “자연적·사회적 운이 없는 집단, 즉 그 가족 및 계급적 기원이 다른 사람들보다 불리하며 (실현된) 천부적 재능으로도 유리한 형편에 있지 못하며 살아가면서 운이나 행운 역시 보잘것없는 것으로 드러난 사람들”인 최소 수혜자에게 더 큰 이익이 돌아가도록 하는 제도적 처방이다.

롤스의 이론은 이후 운평등주의(luck egalitarianism) 이론으로 발전했다. 운평등주의 이론은 다양한 갈래가 있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먼저, 통제할 수 없고 선택하지 않은 운의 차등적 효과로 인한 불평등을 제거하고자 한다. 둘째, 구체적으로 운에 대한 재분배를 위한 제도적인 기획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행운에 대한 재분배는 누진적인 소득세를 통해서 이루어지며 불운에 대한 보상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보장 급여를 통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셋째, 개인의 선택과 운의 효과를 구별하면서도 통합을 시도하였다. 개인의 선택을 강조하는 자유주의적 입장과 운의 불평등한 효과를 재분배를 통해서 제어하고자 하는 평등주의적 입장을 통합하고자 하였다.

이 문제를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블라인드 채용정책을 통해서 좀 더 살펴보자. 블라인드 채용 정책은 2017년 6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공공 부분 블라인드 채용 의무화”를 지시하면서 시작되었다. 베이비붐 세대가 이 사회의 주역이었던 성장의 시대에 한국 사람은 교육을 징검다리 삼아 중산층으로 상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 사회를 흔들었던 ‘SKY 캐슬’ 드라마가 상징하듯 교육은 더 이상 계층 상승의 징검다리가 아니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통로가 되었다. 블라인드 채용은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차별 중의 하나인 학력에 의한 차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다.

하지만 실력 자체(출발선)가 개인의 노력보다는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사회경제적 배경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서 학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차별적 고정관념의 효과를 일부 줄일 수는 있지만, 블라인드 채용을 통해서 출발선의 차별적 조건을 통제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수능점수는 사교육에 의해서 크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사교육의 양과 수준은 부모의 경제적 배경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능력주의(Meritocracy)란 용어는 마이클 영(1958)의 풍자소설 <능력주의의 출현>에서 본격화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이 소설에서 IQ를 기준으로 한 능력주의가 공고화할 차별적 사회구조의 음울한 미래를 전망한 바 있다. 출발선의 차이를 침묵하게 만드는 지나친 성공주의 수사학은 공고화된 ‘불평등의 캐슬’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불평등 문제의 원인을 돌린다.

문재인 정부의 감성적인 슬로건대로 기회가 공평하기 위해서는 또한 결과가 공정하기 위해서는 출발선에 외부 영향이 미치는 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하며 출발 조건의 차별적 효과를 최대한 줄여주어야 한다. 어떠한 방식으로 또한 어느 정도 불평등한 출발선을 보정해 줄 것인가는 사회적 합의를 통해서 결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의 복원이 절실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