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수선화 혁명 / 이명재

14:05

‘수선화 혁명’, 나만의 생각이다. 그냥 붙여 본 것이다. 왜, 그런 것 있지 않은가. 제3세계 나라들의 민중혁명에 꽃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 말이다.

​튀니지의 자스민 혁명, 이집트의 연꽃 혁명, 그루지아의 장미 혁명 등. 그런데 왜 혁명에 꽃말을 결합시킬까. 혁명이 힘과 힘의 대결이라면 꽃은 그 반대 개념이 아닌가.

​어떤 시인은 이렇게 상상의 나래를 폈다. 꽃과 피(血)는 동의어다. 꽃에 붙는 동사는 다른 것이 아닌 ‘피다’이다. 혁명엔 피의 희생이 따랐다. 따라서 혁명은 꽃이면서 피다.

​(꽃이) ‘피다’의 반대말은 ‘지다’이다. 혁명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지는(패하는)’ 것이다. 꽃이 지는 것과 혁명에서 지는 것은 궁극적으로 같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꽃과 혁명을 조합한 이유이다. 그럴듯하지만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 그렇다면 지난겨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우리 촛불 혁명에 꽃을 갖다 붙인다면?

​수선화가 어떨까. 수선화 혁명.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수선화가 겨울꽃이라는 것. 개화 시기가 12월에서 3월 사이이다. 대통령을 탄핵시킨 우리의 촛불집회 기간과 일치한다.

​둘째, 수선화 꽃말의 의미이다. 여러 뜻이 있지만, 자기애(自己愛), 고결, 가르침 등의 뜻에 주목하고자 한다. 촛불혁명의 주체는 시민들이다. 시민이 주인임(자기애)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3개월 동안 20회에 걸쳐 촛불을 밝혔다. 참석자는 연인원 1천6백만 명을 넘었다.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단 한 건의 불상사(구속자 무, 부상자 무)가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다. 참가자들의 높은 시민 의식, 즉 수선화와 같은 고결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셋째, 촛불집회는 좋은 학습의 장이었다.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목소리를 냈지만 목표는 같았다. 박근혜 탄핵! 현장에서 여러 다른 소리를 들음으로써 사고(思考)의 폭을 넓혔다. 수선화의 꽃말 ‘가르침’의 전용(轉用)이다.

​넷째, 우리나라가 수선화의 주요 서식지 중 한 곳이라는 점이다. 수선화의 말뜻이 우리 촛불집회와 부합한다 해도 한반도에 서식하지 않아 생소한 꽃이라면 문제다. 하지만 수선화는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친근한 꽃이다.

​수선화 혁명, 듣기와 말하기에도 자연스럽다. 우리 촛불집회를 나는 앞으로 이렇게 부르려 한다. 촛불집회를 2018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개인이 아닌 기관 및 단체가 받은 전례가 있어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의 ‘수선화 혁명'(?)은 대통령을 탄핵하는데 기본 동력이 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거기에 더해 국민의 높은 민주주의 수준을 세계에 알렸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고 각국 언론들이 보도하고 있다. 즐거운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