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철호 칼럼] 민중총궐기와 노동운동, 저들의 구도에서 벗어나자

이제 우리의 내용을 만들자. 분명히 길은 있다.

16:26

폭력
국토에 비해 너무나 큰 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면서도 하는 일이 도무지 명확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과 부자 사이에 우뚝 솟은 국가라는 존재는 두 계층을 평준화시키는 노력 외에 무슨 역할이 더 필요하겠는가? 국민이 권력을 위임한 것은 공공의 선을 이행하라는 뜻이었다. 그 외에 어떤 권력을 위임한 적이 있는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서 재벌에게 250조가량의 특혜를 주었다. 재벌의 사내유보금이 710조라는 통계도 나왔다. 그러면서 가난한 비정규직 노동자가 밀린 임금을 요구하면 경찰을 내세워 가차 없이 짓밟아 버린다. 이제는 정규직 노동자마저도 멋대로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사장에게 넘기려고 한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저들은 모른다는 말인가?

11월 14일, 10만 노동자, 농민, 민중은 경찰 차벽 앞에 섰다. 암울해져 가는 현실을 지켜볼 수 없어 거리로 나왔다. 당신들이 저지른 폭력에 비하면 그날의 행동은 최대한 질서를 지킨 것이다.

노동법 개악, 역사교과서 국정화 역시 그 바탕에는 재벌 및 부자의 이윤을 늘려주겠다는 의지가 깔렸다. 명색이 국민의 심부름꾼으로 선출된 국회의원에게도 ‘나에게 충성하라’, ‘보답하라’, ‘의리를 지키라’며 앙탈한다. 이러한 임금에게 ‘당신 발가 벗었어!’해도 자기만 벗은 줄 모르는 그에게 노동자민중이 ‘너는 벗었어!’라고 마지막 경고를 보낸 것이 11월 14일 민중총궐기였다.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에는 약 13만여 명이 참여했다. 정부는 차벽과 물대포로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막았다. [사진=참세상 김용욱 기자]
▲지난 11월 14일 열린 민중총궐기에는 약 13만여 명이 참여했다. 정부는 차벽과 물대포로 참가자들의 목소리를 막았다. [사진=참세상 김용욱 기자]

박근혜 정권
대선 당시 장미빛 공약은 다 파기하고 한 사람 입에서 나오는 이상한 얘기를 심복들이 받아 적은 게 국가 정책이 되고 있다. 주기적으로 흘러나오는 해석도 잘 안 되는 얘기가 언론과 국민까지 끌어들여 피터지게 싸우게 한다. 자기 자신만 모르고 있는 무능, 평생을 컴컴한 동굴 속에서 넓고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한 한국의 수구 보수세력의 나태함에 비하면 차라리 조선이 낫다. 조선왕조 오백 년 동안 왕은 자기 학습의 결과를 신하들에게 검증받아야 했고, 사대부 역시 수양을 바탕으로 권력이 유지되었다. 두 세력의 견제와 균형 속에 그 권력이 유지되었다. 나태하고, 자기 자신에 갇혀 있는 권력은 세계 역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저들이 이렇게 나태하면서도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는 견제할만한 힘 있는 세력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중은 지금까지 저들이 거는 싸움에 ‘와’ 하고 달려들었다 흩어지기만을 반복해 왔다. 전체가 공유하는 뚜렷한 지향점 없이 폭발한 시위와 반발은 그 순간이 지나면 잠잠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어떤 때는 오히려 그것이 권력에게 백신 효과를 주기도 했다.

노동자
자본이라는 엄청난 힘 앞에 마주 선 초라한 노동자, 무엇하나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부속품. 규정 속에서만 움직이는 인간. 비인간적인 부분을 모든 인간을 주체로 바꾸어내자는 것이 노동해방이다. 그래야만 우리 사회는 보편적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생산현장에서 마주하고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 두 당사자(공공부문 노동자, 감정노동자, 청소노동자 등등 모두가 물질생산자이다) 사이에서 이윤과 고용조건을 놓고 벌이는 싸움을 우리는 계급투쟁이라고 부른다. 노동자 개인이 사장과 벌이는 미묘한 신경전까지도 계급투쟁이다. 자본주의 생산체제가 존속하는 한 이 투쟁은 지속될 것이고, 그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우리 사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하기에 노동운동과 노동자투쟁은 우리 모두의 것이고 중요하게 자리매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만약 노동운동, 노동자 투쟁이 저들의 구도 속에 갇혀버린다면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다. 저들이 두려워할 세력이 없어져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즉, 지금 저들의 무소불위의 힘, 국정원 댓글, 진보정당 해산, 전교조 법외노조 시도, 세월호, 역사교과서, 노동법 개악 시도 등 이 모든 사태는 노동운동이 저들의 구도 속에 갇혀있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와 개인소득이 비슷한 북유럽 국가의 나름대로 풍요로운 삶은 그 사회의 노동운동의 성격과 방향에서 왔다. 노동조합운동이 사회주의자와 결합했고, 폭넓은 토론을 통해서 많은 의제를 사회에 제출했다. 아무리 사회 변화의 여건이 갖추어진다고 해도 철학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변혁은 일어날 수 없지 않은가? 그들은 인류가 교감하는 노동운동을 그 본래의 목적대로 분명히 했고, 욕망에 갇힌 노동을 사회적 의제 제안을 통해 풀어냈다. 또, 모든 사람들이 해당하는 의제로 발전시켜 인간 모두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점을 사회에 인식시켰다.

만약 중심의제가 전 사회적인 것이고, 모두의 미래를 책임질 희망적인 내용이라면 그 내용과 우리 노동자들의 현실적 내용이 겹쳐지면서 지난 11월 14일 민중총궐기로 인한 사회적 효과는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 노동자, 노동운동, 노동조합운동은 저들의 구도가 아니라 저들과 독립적으로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바탕 위에 민주주의, 사회변화, 새로운 사회에 대한 구상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면 권력에 취해 있는 한국의 수구 보수세력은 잠시 지나가는 그림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된다.

이제 우리의 내용을 만들자. 분명히 길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