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능반 도저히 못하겠다” 숨진 S공고 학생의 호소…기능대회가 뭐길래

"기능반 학생, 입상 못 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경쟁 치열" 

21:16

“지방대회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우리 팀은 정말 형편없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죽도록 훈련했다. 밥 먹는 시간 빼고 거의 하루 절반 이상을 훈련으로 보냈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참고 계속했다. 다른 학생은 방학을 즐기는데 기능생들은 훈련을 해야 했다. 너무 화나고 힘들었다. 날카로운 상태라 파트너와 갈등도 많았다.

대회 하루 전 우리는 새벽까지 짐을 쌌다. 하지만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렇게 위기가 찾아왔다. 메카트로닉스 장비는 젖으면 안 된다. 반지하라 그런지 물이 새고 창문 아래 5cm까지 물이 차올랐다. 우리는 급하게 강당 위로 장비를 다 옮겼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훈련했던 것이 물거품이 될 뻔했다.

대회에 나가서는 무지하게 떨렸다. 하지만 곧 적응이 됐다. 연습하던 대로 잘 작업을 끝냈고 동메달을 땄다. 처음에 실수가 잦아 포기하려 했는데 포기하지 않았더니 마지막 과제에서 1등을 했다. 눈물이 날 뻔했다.” (S공업고등학교 학생이 2019년 10월 전국기능대회 후 남긴 소감문 중 발췌)

기능대회를 앞두고 기숙사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북 S공업고등학교 학생 A 씨(18)가 기능대회 출전을 원치 않았다는 유족과 친구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있다.

A 씨와 초등학생 시절부터 친구였던 학생 B 씨는 A 씨 사망 일주일 전인 1일, 동네에서 A 씨를 만났다. 당시 A 씨는 공원을 걸으며 기능대회 준비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이어가다, 헤어지기 직전 불쑥 말했다.

“내가 죽게 되면 학교에 찾아와서 맥주나 한 캔 부어줘.”

평소와 같은 말장난으로 이해한 B 씨는 “실없는 소리 하네”라고 답했다. 그것이 마지막 대화다. A 씨 사망 후 B 씨는 A 씨 주변 인물들에게 정황을 캐물었고, 기능대회 준비가 스트레스로 작용했다는 생각을 굳혔다.

“작년 전국대회 끝나고 나서 A를 봤어요. 이번 대회만 끝나면 기능반을 그만둘 수 있다고 좋아했어요. 자격증도 땄고, 메달도 따서 나갈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뒤로도 기능반을 그만두지 못했어요. 나가려고 해도 학교에서 자기 파트너는 어쩔 거냐면서 못 나가게 했다고 해요.”(B 씨)

A 씨에게는 기능대회 준비가 학창 시절의 전부였다. 입상에 따라 진로가 뒤바뀌기 때문에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견뎌내야 했다.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평소에도 하루 중 절반 이상을 훈련에 썼다.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만 마음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2019년 10월 전국대회 동메달을 딴 후에도 A 씨는 기능반을 그만두지 못했다.

S공고 학생 C 씨는 A 씨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기능대회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한 번 기능반을 시작한 이상 기능대회에서 상을 따지 못하면 학생에게 남는 것이 없고, 2인 1조로 대회가 진행되기 때문에 마음대로 그만두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기능반은 지금은 옮겼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체육관 지하에 몰려 있었어요. 기능반 학생은 같이 학교를 다녀도 밥 먹을 때 빼고는 보기 어려워요. A가 교과 수업을 들으러 가면 기능반 선생님이 왜 수업 들으러 가냐고 하고, 기능반에 가면 교과 선생님이 왜 수업 안 듣냐고 해서 힘들었다고 해요. 1~2학년 내내 기능반이 너무 힘들어서 나가고 싶다고 자주 얘기를 했어요. 그래도 죽기 일주일 전에 봤을 때는 포스코를 보면서 이번 기능대회에서 자기는 잘 안 돼도 동메달 따 둔 게 있어서 저기 갈 수 있을 거라는 말도 했는데···.”(C 씨)

A 씨의 아버지도 A 씨가 죽기 전 기능반을 도저히 못하겠다는 호소를 했다고 한다.

A 씨 아버지는 “애가 기능반을 도저히 못 하겠다며 집에 와도 되냐고 묻더라. 집에 왔길래 힘들면 개학할 때까지 가지말라 했다. 자기도 생각해본다고 했다”라며 “선생이 애가 학교를 나갔다고 전화가 와서 안 보낼 거라고 했다. 나도 공고를 나와서 애한테 참으면서까지 하진 말라고 했다. 학교 쪽에서는 출석 강요를 안 했다고 하는데 결국 돌아갔고 사고 소식을 들었다. 진실을 밝히고 싶다”라고 말했다.

▲사망한 S 공고 학생의 아버지

박정희 정부 시절 시작한 기능대회
“기능반 학생, 입상 못 하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경쟁 치열” 

장미현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이 2017년 발표한 논문 「박정희 정부 시기 기능경기대회의 도입과 ‘엘리트’ 기능공들의 임계」에 따르면 기능대회는 1966년부터 국내에서 개최됐다. 공고 학생 위주로 진행되지 않던 기능대회는 70년대 중후반 이후 정부의 공업고등학교 집중 지원 등을 통해 공고 재학생 참가율 증가했다.

논문을 보면 기능대회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주말이 없이 기능대회를 연습했으며, 지도 학생의 입상이 지도 교사의 성과로도 인정받아 특별 수당이나 가산점을 받을 수 있었다고 설명한다. 학교 간의 경쟁의식 조성으로도 이어졌다고 한다.

장미현 연구원은 논문에 “기능대회는 기능공 내부의 치열한 경쟁의 장이었다”라며 “박정희 정권이 만든 기능우대사회는 기능을 가진 모든 기능공이 자신의 기술력으로 인정받는 사회가 아닌 경쟁에서 승리한 기능공을 선별해 혜택을 부여하는 방식이었다”라고 적었다.

김경엽 전교조 직업교육위원장은 “지방대회에 4천4백 명 정도가 출전해 전국대회에는 1천5백 명 정도가 나가게 되는데 전국대회조차 나가지 못하는 학생에게 기능반 생활은 취업이나 진학에 아무 의미가 없다”라며 “기능반 학생은 평소 수업도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입상 실적이 없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그래서 평소 학습권을 보장하라고 꾸준히 지적했는데 개선되지 않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한편 S공고는 A 씨에 대한 기능반 활동 강요가 없었다는 입장이다. S공고 교장은 “A 학생이 집에 갔을 때 학교에서는 다시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들어왔다. (코로나 문제 때문에 기능반 합숙에) 동의서를 쓰고 하는데 동의서도 냈다”라며 “A 학생은 파트너와 문제로 힘들었다고 한다. 파트너가 수준이 낮아서 입상하기 어렵다고 했다더라. 학교에서 어떻게 하면 좋겠냐니 파트너를 매일 따로 훈련시켜달라고 주문했단다”라고 말했다.

이어 “A 학생이 작년에 동메달 따서 대기업 특채는 안 되는데 충분히 금은메달 딸 수 있고 특채된다면, 그만두는 데 원인이 그거(파트너와의 불화) 같으면 그걸 해결하는 게 맞나 집에 가라고 하는 게 맞나”라며 “가능성 있는 애를 내쳤다고도 할 수 있다”라고 덧붙였다.

앞서 8일 S공고 기숙사에서 기능반 3학년 학생 A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당시 타살 혐의를 발견하지 못해 사건을 종결했던 경찰은 A 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 기능대회 출전 압박 때문인지 진상을 밝혀달라는 유족의 요청에 22일 내사에 착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