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렬, 10년 만에 신작 시집 ‘너의 이름만으로 행복했었다’ 출간

'해가 지면 울고 싶다' 이후 10년 만
"잘못 쓴 말은 없는지 붉은 루비가 되도록 닦곤 했다"

10:32
Voiced by Amazon Polly

소설가이자 시인인 문형렬의 세 번째 신작 시집 <너의 이름만으로 행복했었다>가 지난달 도서출판 두엄에서 나왔다. 시집에는 작가가 직접 그린 그림 28점과 시 54편이 3부로 나눠 실렸다.

가을 가고 /
누이 빨강 외투는 /
내 기억 속에 혼자서 걸려 있다 /
어린 날부터 멀리 /
나는 늙고 /
누이 세상 떠난 날 지나서까지 /
그래도 걱정하지 않겠다 /
땅에는 이별만 남아 있어도 /
네가 있는 그곳은 /
서러움도 환하고 울긋불긋하겠지

– ‘빨강 외투’ 전문

▲문형렬 작가_라일락뜨락에서 열린 출판기념회 가운데(사진=정용태 기자)

이번 시집에선 여동생을 먼저 보낸 시인의 절절한 슬픔의 노래를 여러 편 찾을 수 있다. 1부 ‘패랭이꽃 1985’ 편에서 “벚꽃, 와서 금방 떠나네”(‘벚꽃 떠나네’)라고 이별의 슬픔을 말했던 시인은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다음 세상에는 / 니가 오빠 해라 / 이 슬픔 다 알도록”(‘은지야 은지야’)이라며 다음 생에서 다시 만나기를 바랐다. 이어지는 ‘빨강 외투’, ‘누이에게’, ‘편지, 누이에게’ 등에서도 그 마음은 여전하다.

2부 ‘눈먼 소년 벌판에서 오래 우네’ 편은 불교의 장례의식을 말하는 ‘다비’로 시작한다. 그리운 사람을 호명하는 ‘봄꽃’, ‘언제나 봄꽃’, ‘황룡사지에서’, ‘풍금 소리’ 같은 시편과 작가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며 쓴 듯한 ‘눈먼 소년 벌판에서 오래 우네’ 같은 시가 실렸다.

눈먼 소년 벌판에서 우네 /
눈먼 소년 벌판에서 혼자 우네 /
기러기들은 마지막으로 정든 집을 떠나네 /
정든 집을 버리고 가는 남쪽 하늘길을 아스라하네 /
나뭇가지로 지은 정든 집은 눈보라로 덮이네 /
눈먼 소년 벌판에 서 있네 /
눈먼 소년 벌판에 혼자 서 있네 /
정든 집은 바람으로 가득 차네 /
정든 집은 꽃잎으로 가득 차네 /
눈먼 소년 벌판에 서서 우네 /
눈먼 소년 벌판에서 오래 우네

– ‘눈먼 소년 벌판에서 오래 우네’ 전문

늙은 권투선수를 노래한 ‘청동상 권투선수’로 시작하는 3부 ‘태양은 나의 그림자’ 편에는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는 ‘4월 레퀴엠’와 ‘4월에 떠나면’ 같은 시편과 ‘당신은 전등사 나부裸婦’, 표제시 ‘너의 이름만으로 행복했었다’ 등을 담았다.

당신은 당신들은 동서남북 전등사 나부가 되어 /
생사 차별 없이 내세생생 지옥불을 받들 거예요 /
화염검이 당신의 혀를 태울 거예요 /
나는 날품팔이 전등사 목수 /
못박힌 나의 슬픔이 /
깨어진 유리창처럼 당신의 운명을 만든다는 것을 /
오래 살아서 부디 잊지 말아요, /
당신이 얼마나 나를 짓밟았는지 /
숨이 막혀서 나는 가슴이 문드러져서 /
바다가 해일로 일어서도록 /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
당신은 전등사 나부, 결코 잊지 말아요

– ‘당신은 전등사 나부裸婦’ 부분

시인은 직접 쓴 발문 ‘혼자만의 약속 35년’에서 “인혁당 무기수 나경일 선생을 아버지로 둔 후배 나문석 시인이 말갛게 탄 숯덩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때가 1988년 가을이었고 ‘두엄’이 막 문을 열었던 때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며 언젠가 베스트셀러 소설가가 되어 그에게 멋진 소설 원고를 주리라는 혼자만의 약속을 했다”고 도서출판 ‘두엄’에서 시집을 낸 까닭을 말했다. 또 “시는 가슴속 서랍에 넣어두고 혼자 꺼내어 보고 속으로 외우며 내가 잘못 쓴 말은 없는지 붉은 루비가 되도록 닦곤 했다”고 시를 대하는 자세를 말했다.

문형렬 시인은 경북 고령에서 태어났다. 영남대 사회학과, 동대학원 철학과를 졸업하고 영남일보 기자와 논설위원을 지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와 소설,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동화와 소설이 각각 당선되었다. 여러 소설과 시집을 써냈고, 한국 장편소설 최초로 <바다로 가는 자전거(Bicycling Over the Ocean)>는 영어 오디오북(러닝타임 6시간 30분)으로 미국 뉴욕에서 제작됐다. 2012년 현진건문학상을 받았다.

정용태 기자
joydrive@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