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더 납작 엎드릴게’, 습관성 굽실 증후군에 시달리는 종교전문출판사 막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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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라니북스’이기에 가능했던 융합과 확장의 결실

대구에서 의성으로 거점을 옮긴 후 출판과 영상작업을 동시에 해내는 ‘고라니북스’ 간판으로 왕성하게 창작활동 중인 김은영&황영 감독 콤비의 신작이 도착했다. 2020년, 고라니북스에서 출간한 동명의 에세이를 각색한 <더 납작 엎드릴게요>다. 출판사와 영상물 제작업을 병행하기에 기획할 수 있는 작업이다. 영화는 5개의 장으로 구분되는 1시간 남짓한 분량이다. 장편치고는 간결한 체급인데 작품 모양새를 보면 웹 드라마 형태로 작업한 것을 편집해 장편영화 버전으로 완성한 느낌이 짙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 책표지 [사진=고라니북스]

에세이 출간 당시 홍보용으로 만든 5분여 북 트레일러를 찾아봤다. 놀라울 만큼 영화의 초반부와 매우 유사한 만듦새가 애초부터 영상화 계획을 고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제작지원 절차를 경유해 새로운 장편이 탄생했다. 그러고 보니 두 감독에겐 최초의 장편영화 작업이다. 여러모로 공동감독과 고라니북스에겐 중요한 이정표 격 작품이 될 테다.

영화는 에세이에서 전반부 위주로 내용을 추려낸 것으로 보인다. 실제 원작자의 체험에 기반을 둔 에세이 내용은 그가 20대 후반에 몇 곳의 관련 직장을 거치다 하필 불교서적 전문출판사에 입사해 30대 중반 직전까지 5년여 동안 머물렀던 시절의 기록이다. 출판사 업무란 게 어딜 가나 대동소이하지만 주위 환경은 퍽 다르다. 출근하자마자 법당에서 예불을 드려야 한다. 일종의 ‘루틴’ 격이다. 절의 스님이나 신도들은 전원 여성인 출판사 직원들에게 바깥세상 호칭 대신에 00’보살님’이라 부른다. 식사 역시 ‘공양’이라 일컫는다. 이쯤 되면 속세의 번잡함 대신에 고즈넉한 환경 속에서 여유롭게 일할 수 있는, 심지어 권태로울 것만 같은 배경이다. 조용한 것 좋아하는 이들에겐 최적의 조건처럼 느껴질 법하다.

하지만 주인공이 다니게 된 새 직장은 엄연히 ‘회사’다. 불교서적 전문출판사건, 가톨릭/개신교 서적 전문 출판사건 심지어 이슬람서적 전문 출판사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몇 가지 호칭이나 자그마한 지점에서 이질감이 발생하긴 하지만 그저 절에 부속된 기관이라 그런 것뿐 엄연히 이곳 또한 한국사회 회사문화와 별다를 게 없다. 그리고 종교의 벽을 넘어 한국사회에서 ‘회사’라는 곳은 (특히 부정적인 측면에서) 대동소이하게 마련이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는 원작자가 절에 부속된 출판사에서 보낸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시련과 인내의 비망록이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 스틸 사진. [사진=고라니북스]

◆ 아주 특별한 ‘회사’ 환경 속에서 주인공이 겪는 만화경의 시간

주인공 ‘혜인’은 몇 되지도 않는 출판사 식구 중 5년째 만년 말단 신세다. 물론 월 1회 회지를 내고 서적의 반출ㆍ입을 관리하는 게 주된 업무이다 보니 출판사에 인원수가 많을 리 없다. 그의 뒤편에는 출판업무 담당 팀장과 고참 대리가 떠억 하니 버티고 있다. 신규직원 채용도 요원하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젊은 혜인은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막내다. 그래서 여전히 온갖 업무 하중은 최종적으로 그에게 전가된다. 진상 손님 전화응대도, 마감이 촉박한 택배 배송업무도, 창고에서 재고물량 확인하는 일도, 정기적으로 간행되는 회지 배포도, 심지어 점심메뉴 주문도 몽땅 혜인에게 내려온다. 하루가, 한주가, 한 달이, 일 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지경이다. 남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할, 하지만 출판노동자의 전형적인 일상(에 특수한 환경이 추가된) 간접체험이 독자 & 관객에겐 충격과 흥미로 다가온다.

각 10분 내외로 구성되는 5개의 장은 각각 ‘사찰 라이프’-‘번뇌의 시그널’-‘달마가 내게 온 까닭’-‘온종일 일하고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기분’-‘더 납작 엎드릴게요’ 순서로 연결된다. 첫 장인 ‘사찰 라이프’에선 마치 약육강식의 정글과도 같은 불교전문 출판사의 실체 해설이 진행된다. 고요한 절간 이미지로 은폐되지만 이중삼중의 부담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직장분위기를 실감나게 묘사한다. 이어서 속속 혜인에게 닥치는 위기와 모순된 지형, 그리고 우여곡절 끝의 일시적 극복과 또 다른 문제가 대두되는 상황이 반복된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 스틸 사진. [사진=고라니북스]

어딜 가나 눈에 띄는, 목소리 크고 월권을 아무렇지 않게 자행하는 ‘진상’이 이곳저곳에서 출몰한다. 아마 다른 종교 관련 기관에서도 별반 다를 바 없이 영화 속과 같은 캐릭터들이 존재할 테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로 문제가 악화된 것을 알면서도 자존심 대결로 치달으며 민폐를 끼친다. 소위 ‘갑질’의 전형이다. 그런 진상들의 ‘난’ 때문에 너무 조용할 것만 같은 출판사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건사고가 터진다. 어디 하소연할 수도 없는 주변 환경 때문에 혜인과 다른 동료들의 감정소모는 극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트콤 드라마 분위기로 적당히 코믹하게 흐름을 풀어내는 덕분에 그런 전개도 쓴웃음으로 넘길 순 있다. 그저 블랙기업 직장인 잔혹사로 치달았다면 5년 넘게 붙어있진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가끔씩 근본적인 문제해결은 아니라도 요행히, 아니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숨통을 겨우 트일 정도로 도움의 손길이 깃들긴 하니까. 혜인은 이달 회지 원고를 날려 먹을 위기에 처하다 초자연적 기운과 연결되어 모면하기도 한다. 사찰이다 보니 달마대사가 상상 속에 출몰하는 식으로 처리하는데 은근히 개연성 있는 묘사다. 물론 호사다마라고 곧바로 문제는 재발한다. 인쇄 넘기려는데 무작정 넘어온 습작 수준 원고 덕분에 인쇄기 멈추고 억지로 교정을 떠맡기도 한다. 어찌어찌 위기를 극복하거나 된통 당하거나 아무튼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렇게 흐르는 시간은 본래 작가의 꿈을 꾸던 혜인에겐 짙은 허무감으로 다가온다.

◆ 꿈을 실종시키는 회사문화의 환상적 묘사

혜인의 꿈을 가로막는 존재는 도처에 잔뜩 널려 있다. 출판사 선배들은 은연중에 자신들이 거쳐 왔던 것처럼 만년 막내인 혜인도 동일하게 감당하기를 종용한다.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종무소 남자과장은 늘 출판사에 기웃거리며 골치 아픈 일을 떠넘기거나 공짜로 얻어먹으려 시도한다. 절의 온갖 관행에 통달한 과장은 별의별 급행처리와 사적 청탁을 들고 와서 출판사와 혜인을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 와중에도 출판사 동료들은 장래 꿈을 위해 이것저것 준비하고 있다. 혜인 또한 자극을 받았는지 원래 꿈인 작가가 되기 위해 하루 10줄씩이라도 퇴근 후에 글을 쓰자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는 낯선 자리에서 노트북을 꺼내들자마자 이내 마감시간까지 그저 엎드려 잠만 자다 돌아갈 뿐이다. 아직 장래를 대비하기엔 현재의 짐이 너무 무거운 것이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 스틸 사진. [사진=고라니북스]

결국 혜인이 노력해도 근본적인 조건의 제약은 변할 기미가 없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왜 나아지지 않는 걸까? 라는 질문을 품안에 감추고 그저 인내해야 할 뿐이다. 물론 진상고객의 패악질이 너무 심해지면 출판사 동료들도 힘을 합쳐 물리치긴 하지만 이는 그저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질 때 찰나에 불과하다. 선배들 또한 혜인과 같은 시간을 겪으며 적응했기에 힘을 합쳐 그릇된 관행과 문화를 바꿀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래도 가뭄에 콩 나듯 벌어지는 합종연횡의 찰나는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지점으로 꼽힐만하다) 허허실실 견뎌내면서 새 일거리를 확보하기 위해 정찰활동에 임해야만 한다. 그렇게 고즈넉한 사찰 한구석에서 피를 말리듯 이어지는 피로감은 사람을 잡는다.

여기에서 오피스 물 장르의 몇몇 전형적인 풍경들이 전개되곤 한다. 잘못은 고객이 했지만 그들은 절대로 과오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게 겉으로는 참선과 수양을 하러 절에 드나드는 이들의 계급의식이 바깥세상과 하등 다를 바 없이 드러난다. 결국 ‘을’의 처지가 될 수밖에 없는 출판사 직원들, 그중에도 막내란 이유로 온갖 감정배설과 문제해결을 말없이 묵묵하게 지원하는 게 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여기에서 주인공뿐 아니라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겪게 되는 선택지가 등장한다. 혜인은 민폐 캐릭터 중에도 T.O.P.에 속하는 연화수보살의 억지에 그만 폭발 직전에 몰린다.

혜인의 상상 속에는 두 갈래 대응법이 있다. 그래도 아직 젊기에 에라 모르겠다! 이판사판이다!! 식으로 시시비비 따져가며 1대 1 승부로 부딪히기. 혹은 모든 진실을 알고 있지만 그저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되새기며 ‘납작 엎드리기’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지금의 위기를 해소할 수 있는 코너에 몰리고 만다. 결국 그가 택하게 될 노선은 과연 무엇일까? 답은 제목에 이미 나와 있다. 재기발랄하게 그 고뇌의 찰나에 주인공의 눈앞에는 뜬금없이 공과금, (스트레스 해소를 위한) 쇼핑 경비, 생활비, 카드요금, 학자금 대출 상환이 의인화된 캐릭터 형상으로 차례로 등장한다. 그들은 이건 못 견디겠지 하며 주인공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다. 항복하기 전까지 멈출 리 없는 기세다. 빵 터지며 배를 잡고 웃게 만드는 연출이지만 의외로 한국독립영화에선 쉽사리 시도하지 못하던 표현방식이 새롭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 스틸 사진. [사진=고라니북스]

◆ 코믹하지만 신랄한, 한국 기업문화와 종교기관 풍자

그렇게 주인공은 납작 엎드리는 것으로 또 하나의 위기를 넘는다. 그렇게 명쾌한 결론보다는 감독의 일상이 끝없이 지속되는 것처럼 이야기는 흘러간다. 이쯤 되면 혜인을 부를 때 절 사람들이 반드시 붙이는 호칭인 ‘보살님’은 존칭이 아니라 무한정 참고 인내하라는 강요로 들릴 지경이다. 종교기관이라는 특성이 무형의 장벽이자 압박으로 완전히 전환되어 버린다.

실제로 노동조합이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면서 가장 큰 벽에 부딪히는 게 재벌기업과 함께 종교기관 관련 사업장들이라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린다. 공공기관이나 대기업은 무작정 뻗대기도 하지만 세상 이목에 신경을 써야 되니 비교적 쉽게 약간의 양보를 얻어내기도 하지만 종교기관은 기본적으로 세속의 노동권을 부정하는 행태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의 종교문화에 내포된 ‘기복신앙’적 측면은 종교기관의 세속화와 대규모화를 조장하고, 종교기관들은 여러 사업체를 거느리고 종교 활동 외에도 수많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사업주로 기능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문제에 대해선 외면하거나 불편해한다. 이런 사례는 잘 드러나지 않아서 그렇지, 도처에서 발생하는 중이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 스틸 사진. [사진=고라니북스]

특정 종교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사회의 그릇된 회사문화와 폄하되는 노동인권 문제가 외부 감시가 상대적으로 적은 종교기관 내부에서 더 고여 있기 때문인 것. 그래서 결국 ‘작은 사회’의 폐쇄성을 벗어나 양지바른 곳에서 햇볕을 쬐어야 해결이 가능한 차원에 속한다. 그러나 이는 말이 쉽지 당사자들만의 노력으로 풀리긴 요원한 숙제다. 배를 잡고 웃다가 자신의 직장 경험과 연관시켜 생각에 빠지다 하길 거듭한 관객들이 그저 조금 특이한 시트콤 보는 것처럼 영화를 흘려보내지만 말고 짚어볼 문제다. 본격 노동영화를 기대한 이들에겐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 묘사나 적당한 봉합이 아쉬울 수도 있지만 애초에 해당 작업이 무거운 하중을 전제한 것이 아니니 과도한 요구는 금물이다.

<더 납작 엎드릴게요>는 웹 드라마 형식을 채택해 ‘일상물’ 성격을 강하게 드러낸다. 극적인 전개로 화끈한 결론을 선보이는 대신 하루하루 우리가 일상에서 겪게 마련인 소소한 ‘루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유형의 장점이 극대화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자신이 겪어온 직장생활 애환을 떠올리며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고 만다. 독립영화를 챙겨보던 이들이라면 만만찮은 출연진 명단만으로도 기대치가 올라갈 법한 작업이기도 하다. 김연교, 장리우, 손예원, 임호준, 김금순 같은 얼굴 친숙한 믿고 보는 배우들이 다소 평면적인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허술한 구석이 없도록 영화 속 공간을 꽉 채워준다. 그런 덕분에 넘쳐나는 유사한 작업들 가운데 본 작품은 특별한 개성을 남긴다. 혹시 뒷이야기가 궁금한 이들은 고라니북스에서 2020년 출간한 동명의 에세이를 찾아보면 될 테다.

<작품정보>

더 납작 엎드릴게요 Will you please stop, please
2023 | 한국|드라마|63분
감독/편집 김은영
출연 김연교(송혜인 역), 장리우(윤팀장 역), 손예원(김대리 역),
임호준(안과장 역), 김금순(연화수 보살 역), 윤진(공과금 역)
특별출연 이세령(카페 알바생 역)
PD 모상미, 황영
극본 헤이송
촬영/CG/D.I 전상진
조연출 김선빈
스크립터 박재현, 장병기
슬레이트 이효미
동시녹음 권민령
미술/세트 고라니북스
음악 심상명
기획 고라니북스
제작 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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