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50cm’, 편견의 장벽을 돌파하는 둘만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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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영화의 매력은 다양한 지점에서 발생하지만, 그 왕도에 가까운 것은 ‘언더 독’, 즉 절대강자가 아닌 이들이 자신의 노력 + 집단적 협력으로 난관을 극복하는 서사일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스포츠 종목의 세부적인 승부와는 별개이지만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요소가 있다. 험난한 삶과 시련에 굴하지 않는 도전 역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테다. 단편독립영화 <50cm>는 그 둘을 겸비한 드문 단편영화다. 두 요소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지만 명백히 영화의 초점이 후자에 놓여 있기는 하다. 그런데 그 시련이 듣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수준이다. 과연 영화는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내고 갈등을 해소하게 될까 찬찬히 살펴보자.

▲영화 <50cm> 스틸 사진 [사진=독립영화배급사 ‘센트럴파크’]

◆ 자유롭게 달리고픈 이들을 가로막는 세상의 숱한 장벽들

두 젊은 여성이 조를 짜 트랙을 달린다. 둘은 떨어지지 않기 위해 서로의 팔뚝을 연결하는 천 조각을 묶어뒀다. 상당한 기간 동안 호흡을 맞추지 않고는 제대로 속력을 낼 수 없는 조건이다. 관객은 자연히 둘이 밀접하고 친근한 관계임을 짐작하게 된다. 여름날 둘은 경쾌하게 트랙을 달린다. 싱그러운 청춘물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하지만 곧 관객의 입가에 그려지던 미소는 당혹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은정’과 ‘가영’, 두 파트너 중 가영의 얼굴을 유심히 본다면 곧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테니 말이다. 가영은 시각장애인이고 은정은 비장애인이다. 자연스럽게 마치 장애인과 활동지원사 같은 조합으로 둘의 처지가 인식될 것이다. 은정은 가영을 데리고 다니다 함께 거주하는 집으로 돌아온다.

은정에게 엄마의 전화가 걸려온다. 처음엔 반찬은 부족하지 않으냐, 집에는 언제 한번 돌아오느냐 같은 일상 안부로 진행되던 통화는 이내 엄마의 가영에 대한 불만으로 치닫는다. 듣기 거북하지만, 은정의 엄마는 자신의 딸이 가영의 수발에 노예처럼 동원된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베란다에서 통화를 하지만 실내의 가영에게도 다 들릴 지경이다. 분위기를 살피던 가영은 조용히 이어폰을 낀다. 어떤 상황인지 다 짐작한다는 표정이다. 한두 번일 리 없는 경우다.

은정은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인다. 곧 있을 마라톤 시합에 출전하기 위해 땡볕 속에도 둘은 다른 마라톤 동호회원들과 함께 강변 트랙에서 연습하러 나간다. 하지만 폭염 속에 그냥 들어가자는 은정의 요청을 가영은 거절하고 조금이라도 달리자며 거듭 고집을 부린다. 강변으로 가는 중에 의식의 흐름처럼 자연스럽게 충돌과 사건이 일어나지만 겨우 수습하고 둘은 마침내 연습할 장소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곳엔 아무도 없다. 서로 민감해진 상황에서 다른 회원들이 통지한 메시지 확인을 깜빡 놓치고 만 것이다. 그 때문에 더 짜증이 난 은정은 가영과 다투고 헤어진다. 충돌상황 묘사가 꽤 강도가 높다.

하지만 잠시 머리를 식히자마자 은정은 곧 가영이 혹시 사고라도 당하지 않나 염려해 뒤쫓아 간다. 그리고 결국 재회하게 된 둘은 자존심 혹은 고집 때문에 잠금장치를 하듯 감춰뒀던 진솔한 속내를 끄집어내며 화해에 이른다. 고전적인 ‘카타르시스’와 그 정화작용이 온전히 펼쳐진다. 그런 곡절을 거치며 비온 뒤에 땅이 굳어지듯 다시 관계를 회복한 둘은 준비해왔던 마라톤 대회에 함께 서로의 팔을 묶은 채 출전한다. 그리고 둘만의 레이스를 달린다.

▲영화 <50cm> 스틸 사진 [사진=독립영화배급사 ‘센트럴파크’]

◆ 세상의 일방적 척도를 초과하는 두 주인공의 갈등구도

<50cm>는 20분 조금 넘기는 ‘단편’다운 ‘단편’ 호흡을 선보인다. 장애인-비장애인 2인이 함께 파트너로 출전하는 육상경기가 영화 속 무대다. 한 조로 서로 의지하는 표상이 되는 연결 줄의 길이가 곧 이 영화의 제목이 된다. 줄의 간격은 단지 물리적 거리를 넘어 두 주인공 사이의 감정과 관계성으로 확장된다. 스포츠 영화의 정석적인 구조와 장치를 십분 활용하는 전개다. 하지만 여기에 추가로 장애인 vs 비장애인 구도를 넣어 대내외적 갈등 요소를 강조한다. 그렇게 현실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주인공들이 넘어야 할 거대한 장벽으로 위치시킨다.

언제나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은정과 가영의 관계는 단순 명확하다. 가영은 불쌍한 존재이고 은정은 칭찬받는 구도다. 장애인 친구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착한 비장애인 ‘절친’의 희생정신은 칭송되기 딱 좋지만, 지극히 일방적이라는 점이 간과되는 것이다. 그 단순하고 편파적인 잣대가 바로 세상 사람들이 둘 사이를 규정하는 기준이 되고야 만다. 대부분의 문제는 거기에서 비롯된다. 둘의 다툼과 긴장의 골은 바로 그 스테레오 타입 규정화에서 시작된 것이다.

▲영화 <50cm> 스틸 사진 [사진=독립영화배급사 ‘센트럴파크’]

왜 항상 은정은 세상의 시선에 시달리면서 장애인 친구를 돌보는 역할에 갇혀야만 하는가. 스트레스 부담으로 은정은 가영에게 소홀하거나 화를 냈다 다시 사과하는 과정이 반복된다. 하지만 그게 온전한 관계로 계속 기능한단 게 가능한 일일까? 둘은 영화 내내 그 긴장을 분출하며 밀고 당기기를 거듭한다. 가영은 자기가 은정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자기 앞가림을 할 수 있다며 뻗대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어쩔 수 없는 한계 때문에 은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자신이 미안해해야 하는데 왜 늘 은정이 자신에게 사과하는 거냐며 괜히 화가 난다. 그런 감정싸움 끝에 마침내 또 다른 비밀이 공개된다.

어느 정도 상황이 전개되면서 의구심을 품었을 관객의 머릿속 가정을 은정이 직접적으로 확인시켜준다. 차라리 사람들이 우리 둘이 레즈비언 관계라는 걸 의심이라도 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그저 장애를 가진 친구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비장애인 친구 사이가 아니라 실제 연인이었던 것이다. 이 충격 공개의 순간, 화면을 지켜보던 상당수 관객은 설마가 정말이라는 사실에 당혹해할 테다. 당연히 고정관념 속에서는 장애인-비장애인 간의 사랑, 그것도 퀴어 코드가 쉽게 상상되지 않기 때문에 오는 착시작용에 스스로 갇혀버린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놀라고 부끄러워질 순간이다.

그렇게 영화는 이중 삼중의 차별적 시선을 망치나 곡괭이로 내리치듯 분쇄해버리는 괴력을 발휘한다. 신체적 한계인 시각장애 + 동성애라는 심리적 낙인이 동시에 교차되면서 두 주인공을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 그리고 서로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쉽게 뛰어넘기 힘든 현실의 벽을 복합적으로 구축해 보여주는 작업이다. 웬만큼 치밀한 사전 준비가 없었다면 ‘삑사리’ 나기 딱 좋을 형태의 작업이다. 그러나 영화는 별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게 그 ‘쎈’ 소재들을 적절히 구조화해낸다. 단편영화 연출력 측면에서 이 정도로 누수 없는 관리능력은 충분히 준수하다고볼 수 있겠다.

◆ 지역 배경과 치열한 연기가 적절한 균형을 이룩한 영화

스포츠 장르영화 + 사회적 마이너리티 조명 + 여기에 로맨스물이라는 중층구조를 취하지만 별 무리 없이 조밀하게 서로 충돌하기보단 두터운 결속이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그런 잘 짜인 전개력에 더해 연기 합도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 영화 내내 거의 은정과 가영 역을 맡은 두 배우만 등장하지만 빈 구석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영화 속 현실에서 전반부에는 구체적 관계성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굳이 별도의 트릭으로 둘의 관계를 위장하지도 않는다. 단지 편집의 묘를 살리는 돌파력이 대단하다. 처음엔 의아하던 찰나들이 지나고 나서 보면 거의 다 개연성을 갖고 합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렇게 퍼즐 맞추듯 전반부의 의문이 후반부에서 보물 상자 개봉하듯 낱낱이 공개된다.

▲영화 <50cm> 스틸 사진 [사진=독립영화배급사 ‘센트럴파크’]

그런 미덕에 더해 본 작품의 평가에서 특기할만한 지점이 추가로 등장한다. 이 영화는 김소정 감독과 ‘가영’ 역 신가영 배우의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전체 분량이 촬영되었다. 감독에게 익숙한 고향을 배경으로 한 덕분에 원활한 촬영협조는 물론 스포츠 멜로물에 어울리는 근사한 풍경을 담아낼 수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지역에서 촬영기간 개최된 2022년 안동마라톤대회 행사를 거저 로케 현장으로 활용해 작은 영화의 제작환경을 일정부분 초월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대회 현수막에서 지명이 표기된 문구 중 단 한글자만 가리는 것만으로 특정 장소에 제한되어버릴 위험요소는 영리하게 회피한다. 즉 아는 만큼 보이는 건 강점으로 챙겨놓지만, 굳이 특정 장소 배경을 인지하지 않아도 영화 감상에 거의 문제가 없는 안배다. 그만큼 허투루 지나치는 게 별로 없는 치밀한 연출이다.

「본 칼럼에선 대구-경북지역 독립영화를 위주로 소개하고 있지만, 사실 거의 대부분 대구권에 편중된 게 사실이다. 대구조차 4년제 영화학과가 부재한 상황이지만 경북 타 도시에는 대구만큼의 지반도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드넓은 경북 내에서 영화가 제작되는 경우가 드물긴 하다. 하지만 여러 차례 소개했던, 대구에서 거점을 의성으로 옮겨 활발하게 작업 중인 ‘고라니북스’ 사례처럼 몇몇 지역에선 영화 창작이나 로케이션이 끊임없이 목격되는 중이다. 안동의 경우에도 몇 해 전에는 일본의 사토 토모야 감독이 한국 배우를 기용해 <호저의 하늘, 2019>라는 장편 독립영화를 안동 올 로케이션으로 제작한 바 있다. 해당 작품은 유서 깊은 일본 유바리 판타스틱영화제 대상을 수상하는 등 꽤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최근엔 독립운동기념관 연계로 항일독립운동 소재 단편영화도 제작 및 상영되는 기획도 선보였다. 그런 미약한 흐름을 포착하고 협력하는 과제 또한 논의되어야 할 문제일 테다.」

▲영화 <50cm> 스틸 사진 [사진=독립영화배급사 ‘센트럴파크’]

안동의 풍광과 마라톤대회를 잘 활용한 배경 설정도 돋보이지만 역시 <50cm>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그저 환하게 밝지만 않은 시린 청춘을 더할 나위 없이 구현해낸 ‘은정’ & ‘가영’ 두 배우의 빛나는 연기임이 분명하다. 은정 역을 맡은 이진하 배우의 강렬한 이미지와 고뇌하는 연기도 대단하지만 시각장애인 ‘가영’ 역을 담당한 신가영 배우의 활약은 실제 장애인 여부를 관객이 궁금해 하는 것을 당연하게 만들어버린다. 장애인 역할을 소화하기 위해 3개월 동안 프리 프로덕션 단계를 준비하며 적응훈련에 임한 배우와 제작진의 노력 덕분에 장애인 연기에서 위화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리얼리티가 확보될 수 있었다. 그런 견고한 구조와 사전준비 덕분에 영화는 많은 부분 섬세한 비언어적 수단으로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풀어내는데 성공적인 결과물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 탄탄한 리얼리티에서 급 판타지 정서로 화룡점정을 놓치다

하지만 잘 달려오던 이야기는 막판에 아쉬움을 노출한다. 어쩌면 감독 본인도 촬영현장에서 모니터로 배우들의 화학적 결합을 감격하며 응시하다 도취된 걸까. 꿋꿋하게 지켜오던 개연성이 막판에 조금이나마 궤도를 이탈하고 만다. 물론 그 궤도 이탈은 대신에 정말 그림 같은 탈주의 이미지를 창조해내긴 한다. 하지만 그 확연히 아름다운 장면은 지나치게 돌출적으로 튄다. 그 일순간에 영화가 20분 동안 버텨온, 트랙을 함께 호흡을 맞춰 한발씩 탄탄히 내딛던 주인공들의 무게감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린다. 정교하게 조립해온 비례와 조화를 내던지고 감독이 보고 싶어 한 판타지의 장으로 급작스럽게 돌변하고 마는 것이다.

▲영화 <50cm> 스틸 사진 [사진=독립영화배급사 ‘센트럴파크’]

물론 충분히 감독의 의도는 이해되는 부분이긴 하다. 소수자 인권향상과 차별 없는 세상으로의 도도한 흐름이 일시적으로 벽에 부딪히고 정체되거나 심지어 후퇴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요즘 뭔가 간절히 보고픈 풍경을 그림처럼 화면에 구현하고 싶은 유혹은 너무나 달콤할 테다. 하지만 (공들여 선곡했을 게 분명한) 삽입곡의 과도한 돌출로 인해 화룡점정이 되어야 할 둘만의 질주는 뮤직비디오 풍으로 갇혀버린다. 둘의 희로애락이 분출하던 영화 속 세계에 느닷없이 낭만 그 자체인 리듬이 둥실둥실 뜨면서 주인공들이 내딛던 발걸음도 함께 부유하는 것처럼 다가오는 순간이다.

두 주인공의 찬란히 빛나는 이탈을 더 근사하게 장식하고 싶었던 감독의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확실히 좀 과했다. 아마 마지막 엔딩 부분이 조금만 더 절제되었더라면 (필자의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목록에서) <50cm>는 2023년을 대표하는 단편독립영화로 한 단계 더 승격되었을 것이다. 막판까지 위기를 돌파하며 힘차게 역주했지만 끝마무리가 2% 부족해진 셈이다. 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개성과 출중한 구성의 주목받을만한 작품인 건 분명하다.

<작품정보>

50cm
2023|한국|드라마|22‘06“
연출 김소정
출연 이진하(은정 역), 신가영(가영 역)
삽입곡 “도망가자” – 선우정아
배급 센트럴파크

2023 24회 가치봄영화제 대상(김소정), 배우상(신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