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부회장, 수동적으로 뇌물 건넨 ‘피해자’ 돼···석방

[판결 분석]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 판단에 제3자 뇌물 모두 무죄... 재판부는 왜?

11:54
▲2018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등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진=오마이뉴스 이희훈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353일 만에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서울고등법원 형사13부(부장판사 정형식)는 5일 박근혜 전 대통령과 ‘비선실세’ 최순실씨에게 433억 원의 뇌물을 건네거나 약속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 부회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법원이 재벌총수에게 1심에선 징역 5년을 선고한 뒤 2심에서 집행유예가 가능한 징역 3년을 선고한다는 일명 ‘3·5 법칙’보다 더 낮은 형량이다.

이 부회장과 함께 구속돼있던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아래 미전실)과 장충기 전 미전실 차장도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으며 풀려났다. 박상진 전 삼성전자 사장은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황성수 전 삼성전자 전무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날 법정에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과 이 부회장을 포함한 삼성 관계자들은 각자 서류를 보거나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며 재판부를 기다렸다. 간혹 피고인들끼리 가벼운 대화를 주고받는 걸 제외하면 고요했다. 재판부가 입정하자 이 부회장은 긴장한 듯 입을 오물거리기도 했다. 재판부가 마지막에 형량을 선고할 땐 방청석에서 탄성이 나왔다.

재판부는 “전형적 정경유착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없다”며 “이 사건은 최고 권력자인 박 전 대통령이 국내 최대 기업인 삼성을 겁박해 뇌물로 나아간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1심에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이라고 정의한 것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이는 이 부회장의 형량에도 영향을 미쳤다. 앞서 1심에서 ‘정유라 승마지원’,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지원 등이 뇌물로 인정되면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던 이 부회장은 항소심에서 승마지원만 뇌물로 인정되면서 집행유예로 풀려나게 됐다. 재판부는 도대체 어떤 논리로 이 부회장을 풀어준 걸까.

▲2018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등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진=오마이뉴스 이희훈 기자)

1심 재판부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의 부도덕한 밀착”
→ 2심 재판부 “전형적 정경유착을 이 사건에서 찾을 수 없다”

1심과 달리 항소심 재판부는 ‘안종범 업무수첩’을 증거로 보지 않으면서 이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를 부정한 청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안종범 수첩은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독대 내용뿐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의 지시사항, 발언 등을 받아 적은 수첩으로 일명 ‘종범실록’, ‘박근혜 정부 사초’라고도 불렸다.

수첩에는 ‘금융지주회사’, ‘동계스포츠 선수 양성 방안’, ‘1. 승마협회 + 마사회, 1) 이재용 부회장 인사’ 등 이 부회장과 박 전 대통령 사이에 오고 간 뇌물합의와 부정한 청탁에 대한 다수의 정황이 적혀 있다.

1심 재판부는 안종범 수첩을 박 전 대통령이 이런 현안들을 지시하거나 발언했다는 간접사실에 대한 정황증거로 채택했다. 이를 근거로 1심 재판부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등 개별 현안 11개를 이 부회장이 모두 박 전 대통령에게 직접 청탁했다고 보진 않았지만, 이 부회장이 이 모든 현안을 합친 ‘승계작업’의 주체이며 승계작업의 성공으로 인한 이익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지위에 있는 사람으로 봤다.

그러나 항소심에서 안종범 수첩에 대한 증거능력을 배척하면서 이 부회장은 박 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어떠한 현안에 대한 대가도 없이 ‘수동적으로’ 뇌물을 건넨 피해자가 됐다.

재판부는 “수첩에 박 전 대통령의 지시 내용과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대화가 기재돼있다는 자체만으로 대화 내용을 인정한다면 전문증거(간접증거)가 우회적으로 진실 증명의 증거로 사용되게 된다”고 말했다.

‘부정한 청탁’이었던 경영권 승계가 무너지면서 1심에서 유죄로 판단했던 이 부회장의 혐의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2018년 2월 5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 등에게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고 복역 중이었다가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사진=오마이뉴스 이희훈 기자)

수동적으로 뇌물을 건넨 피해자가 되다

1심에서 전부 유죄였던 영재센터 지원은 제3자 뇌물죄의 구성 요건인 ‘부정한 청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뇌물공여, 횡령 혐의 모두 무죄가 됐다. 박상진 전 사장은 이 부분에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여러 번 끄덕였다.

또, 재판부가 박 전 대통령이 삼성의 정유라 말 구매 뒤 이 부회장에게 감사 인사를 지시한 것으로 보이는 안종범 수첩 내용도 배제하면서 최씨의 말 소유권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최씨가 마필과 차량을 무상으로 사용한 부분만 뇌물로 인정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수첩을 작성한 안 전 수석의 진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수첩을 작성한 안 전 수석은 이 부회장의 1심 공판에 증인으로 나와 “대통령의 지시사항이면 ‘VIP’라고 적어놓았으며 대통령이 말할 때 그 내용을 수첩에 그대로 받아 적었다. 제 생각을 가감한 것은 없다”고 진술한 바 있다.

1심 재판부는 이 부회장을 ‘뇌물공여자’로 판단했지만, 항소심 재판부가 이 부회장을 박 전 대통령과 최씨의 강요에 의한 ‘피해자’로 보면서 이 부회장은 수의를 벗게 됐다.

재판이 끝난 뒤 삼성 변호인단 이인재 변호사는 “중요한 공소사실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의 용기와 현명함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기사제휴=오마이뉴스 배지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