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페미니스트로 (故) 박원순 기리기:남성특권에 관하여 / 이소훈

09:56

故 박원순 시장이 갑작스럽고 비극적으로 사망했다. 그가 “정말 성추행을 했는지” 사건의 진위에 대한 갑론을박은 감정적이고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고인을 피고인으로 조사를 할 수 없기에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게 되었다.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 왜 피해 여성에게 사과를 남기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알 수 없다.

이같이 미심쩍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애도하는 이유는 그의 공로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50만여 명의 시민들과 마찬가지로 서울시장(葬)에 반대한다는 청원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기차역에서 “사회적 경제 마켓”이란 표시 아래 작은 공예시장이 선 사소한 풍경에 문득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다. 아마도 앞으로 서울광장을 지날 때면 언제나 그에게 빚진 마음이 들 것이고, 서울시 구석구석 있는 그의 흔적을 보며 어쩔 줄 모르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모든 페미니스트를 대표할 수는 없지만, 나와 같이 황망하고 무거운 마음을 가진 이가 많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의 불명예스러운 죽음은 그를 신뢰했던 여성주의자들에게 비탄과 배신감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페미니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고 박원순 시장의 죽음을 슬퍼하고 그의 업적을 기릴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성추행에 대한 진실을 조사하는 것이 망자에 대한 모독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런 이분법적 프레임이 잘못된 이유는 피해 여성을 지움으로 실추된 고인의 명예를 회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방적인 추모 방식은 성희롱, 성추행, 성폭행을 경험한 우리 사회 수많은 여성의 경험을 주변화시킨다. 나는 고 박원순 시장의 성추행 사건을 우리 사회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2017년 대구시청을 찾은 故 박원순 시장.

1. 성추행은 소수의 경험인가?

2018년 여성가족부에서 실시한 성희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 여성 7명 중 1명이 지난 3년간 직장에서 성희롱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실태조사는 모두가 알고 있는 성희롱과 권력의 관계를 숫자로 나타냈다. 성희롱 피해자는 나이가 어릴수록, 또 비정규직일수록 더 많았다. 성희롱 경험을 한 여성의 비율은 남성보다 세 배 이상 높았다. 성희롱 행위자는 상급자가 가장 많았고, 성별은 대부분 남성이었다. 성희롱 피해 경험자의 절대다수(81.6%)가 피해 사건에 대해 대처하지 않고 “참고 넘어갔다”고 말했다. 27.8%는 피해 경험에 대해 주변의 부정적인 반응이나 행동 등으로 2차 피해를 경험했다고 말했다.

▲자료=여성가족부 2018년 성희롱 실태조사
▲자료=여성가족부 2018 성희롱 실태조사

놀라운 사실은 공공기관 중 유독 지방자치단체에서 근무하는 직원 중 성희롱을 경험한 비율이 전체 평균보다 세 배 이상 높았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들 중 공식적으로 신고를 한 사람 모두가 적절한 조치가 없었다고 응답했다. 이는 공공기관, 특히 지방자치단체에서 성희롱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데도 전혀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직장에서 성희롱은 빈번하게 일어나고, 많은 피해자들이 공식적인 신고를 하지 않으며, 신고를 하더라도 2차 피해를 경험한다. 이는 실태조사를 비롯한 여러 연구를 통하여 이미 입증되었다. 성폭력 무고죄 기소율이 0%에 가깝다는 것도 연구를 통해 드러났다. 이러한 실증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안희정 전 충남지사, 오거돈 전 부산시장, 고 박원순 시장에게 당한 피해를 고소한 여성은 ‘꽃뱀’이라고 불리며 인신공격에 시달렸다. 이들 단체장들은 (논란이 된 본인들의 사건 외에도) 지방자치단체가 여성들에게 유독 적대적인 직장문화를 가진 것에 대한 책임이 있다.

2, 성추행은 ‘오해’에서 비롯될 수 있는가?

가정을 해 보겠다. 고소인이 성추행이라고 주장한 박원순 시장의 언행과 행동이 그에게는 ‘로맨스’였을까. 폭력과 로맨스의 온도차를 살펴보려면 먼저 남성 특권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한다. ‘특권’을 뜻하는 영어단어 ‘privilege’의 라틴어 어원은 ‘사법(private law)’이다. 서민에게는 공적인 법을 적용하면서도 왕족과 귀족 등 특정 집단에게는 사적이고 특별한 법을 적용하여 벌을 피하거나 혜택을 독점하던 데서 비롯되었다.

현대사회에서 특권이란 개인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인구학적인 특성, 출신 배경에 따라 주어지는 비교우위적 특혜를 말한다. 젠더, 계급, 민족/인종, 성 지향성, 시민권 등 여러 권력 관계에서 특권이 형성된다. 젠더 권력 관계에서 우위를 뜻하는 남성특권도 그중 하나이다. 남성 특권의 증거는 다음과 같은 사소한 상황이다.

직장에서 성별 때문에 조롱이나 불편한 농담을 들을 걱정을 하지 않는 것. 내 업적이 아닌 성별 때문에 직장에서 받을 대우에 대해 걱정을 하지 않는 것. 소속 단체의 대표나 임원이 같은 성별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 만원 지하철에서 불편한 신체접촉이 있을까 염려하지 않는 것.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밤길을 혼자 다니는 것 등.

대다수의 여성이 누리지 못하는 이 특권은 개인의 업적으로 이룬 것이 아니고, 단지 남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주어졌으며, 아무리 양심 있는 남성이라도 누리지 않을 방도가 없다. 특권의 경험은 한 집단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상시적이지만 다른 집단에게는 그 문이 굳게 닫혀있다.

철학자 샌드라 하딩은 헤겔의 노예와 주인 관계 비유를 들어 여성주의 인식론적 입장론(standpoint feminist epistemology)을 설명한다. 헤겔은 노예와 주인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이해하려면 노예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주인의 입장에서 보는 것보다 정확하다고 말한다. 주인은 노예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하지만, 노예는 자신의 사정도 알고 주인의 사정도 잘 알기 때문이다.

하딩은 억압받는 사람의 입장이 오히려 ‘강한 객관성(strong objectivity)’을 보인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삶에서 마주하는 한계를 연구할 때 사회위계구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권은 배타적일 뿐 아니라 잠재적으로 폭력적이며 압제적이다. 특권층이라면 개인의 결정이나 노력과 상관없이 혜택을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 아무리 도덕적인 사람에게서라도 그 폭력성이 언제든지 발현될 수 있다. 이를 잠재우는 유일한 방법은 내가 누리는 특권만큼 동일한 양을 성찰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사실, 이 성추행 사건의 본질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단순 명료한 문제이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힘이 더 약한 사람이 폭력을 경험하였다고 한다면 그 관계가 어떻게 미화될 수 있겠는가? 내가 남성 특권을 설명한 이유는 성추행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왜 그랬는가, 앞으로 무엇을 고쳐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함이다.

성추행은 빈번히 일어나며,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행위이다. 성추행의 문제는 ‘펜스룰’을 핑계 삼아 여성을 공적인 자리에서 몰아낸다고 절대 고칠 수 없다. 여성주의적 관점이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한다’고 비판하고 회피하면 안 된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남성 특권의 의미와 영향에 대한 뼈아픈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고 박원순 시장의 비극적인 죽음의 아픔을 넘어서는 시작점이 될 것이다. 모두가 그를 추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