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역차별 담론과 인권의 뒤틀림 / 육주원

17:11

최근 대구시청 한 남성 공무원이 여성은 일직(오전 9시~오후 6시), 남성은 숙직(오후 6시~오전 9시)을 전담하는 시의 관행이 양성평등에 위배되는 차별 행위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성역할 고정관념이나 성별에 따른 직무 분리는 찬찬히 그 원인을 들여다보고 개선의 방향을 고민해봐야 할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이슈화되는 방식에는 흥미로운 점이 있다.

우선 미디어 보도 제목만 몇 개 보자. “여성공무원 절반 넘었는데… 계속 남성만 숙직하는 건 역차별?”, “왜 우리만··· 남성 공무원들 불만, 결국 터졌다”, “‘성차별 숙직 시정 촉구’ 男공무원 진정한 양성평등 실현돼야” 대부분의 기사에서 남성에게만 숙직을 담당케 하는 관행이 “성차별”이고 “진정한 양성평등”에 위배되기 때문에 남성 공무원들이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논조인데, “여성공무원 절반 넘었는데”, “진정한” 양성평등, “결국 터졌다” 등에서 느껴지듯, 직접 언급되고 있진 않지만 최근 몇 년간 미투 운동으로 등으로 촉발된 한국 사회 성평등 담론에 대한 묘한 반발감과 기계적 평등주의에 대한 맹신이 이러한 논조 뒤편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공무원이 절반이 넘을 정도로 세상이 평등해지고 있는데 오히려 남성에게만 부담이 전가됨으로써 진정한 양성평등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식의 주장은 위 보도의 제목 중에서도 언급되는 “역차별” 담론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실로 역차별 논란은 여성 고용 할당제와 같은 젠더 이슈에서부터 난민 수용, 이주노동자 최저 임금,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블라인드 채용, 사회적 소수자 대학 특별전형 등 사회적 소수자와 관련된 쟁점과 구조적 차별을 개선하고자 하는 거의 모든 정책을 둘러싸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있다.

수업 중 학생들의 보고서에서도 특정 사회문제를 잘 파헤치다가 맥락 없이 “역차별의 소지가 있을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접근해야 한다”는 말이 단골 문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1 역차별이 우리의 일상어로 들어왔다는 이야기이다. 우리 사회가 차별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한 지도 정말 얼마 안 되었는데 이제 역차별 담론이 차별 담론을 가릴 정도라니 실로 모든 지 압축적으로 경험하는 사회임은 틀림없나 보다.

▲영미나 많은 유럽 국가에서 역차별 담론은 탈인종(post-race), 포스트 페미니즘 담론 등과 착종되어 나타났다. 포스트 담론은 차별은 나쁜 것이지만 이제 그런 나쁜 상황은 거의 다 지나갔다며 우리에게 가볍게 말을 건넨다. (사진=pixabay.com)

탈인종, 포스트 페미니즘 담론과 착종된 역차별 담론
전용되는 ‘평등’, 평등을 ‘이미 달성된 것’ 간주케 해
‘차별할 자유’를 빼앗는 것도 역차별이 되어버려

영미나 많은 유럽 국가에서 역차별 담론은 탈인종(post-race), 포스트 페미니즘 담론 등과 착종되어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오바마 대통령 당선이 이제는 모두가 ‘인종’ 문제에서 자유로운 탈인종 사회(post-racial society)를 알리는 징표로 여겨졌으나 21세기에도 경찰 폭력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흑인 시민의 모습과 흑인의 코로나 감염률, 사망률이 백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는 사실은 이런 탈인종 사회 선언이 허구임을 보여준다.

여전히 수많은 여성이 젠더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돌봄의 책임은 여성에게 편중된 채 노동시장의 성별 격차에는 어떤 획기적인 변화도 없으면서, 마치 여성도 본인의 노력과 의지만 있으면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는 식의 긍정의 서사. 포스트 페미니즘의 옷을 입고 등장하는 이러한 장밋빛 수사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특정 포스트 담론은 ‘평등’의 언어를 전용하면서 동시에 평등을 ‘이미 달성된 것’으로 간주하게 만든다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차별과 그 참혹한 현실에 대해 듣는 것은 사실 별로 즐거운 일이 아님에 반해 이러한 포스트 담론은 차별은 나쁜 것이지만 이제 그런 나쁜 상황은 거의 다 지나갔다며 우리에게 가볍게 말을 건넨다. 포스트 담론이 사실이 아님에도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여겨 반복하게 되는 이유이다.

이렇듯 역차별 담론은 현실의 복잡한 맥락을 다 제거하고 기존 평등의 문법을 뒤집어 우리 시대 ‘진정한 차별’은 ‘역차별’뿐이라는 생각을 유포하게 된다. 나아가 차별 철폐를 주장하거나 시정하고자 하는 움직임 자체를 역차별의 증거로 인식한다.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을 하지 말자는 지극히 기초적인 인권에 입각한 주장은 ‘성적 다수자’를 향한 역차별으로 둔갑하고, 난민 신청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정당한 심사를 받을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은 국민을 향한 역차별로 둔갑한다. 즉 누군가를 ‘차별할 자유’를 빼앗는 것도 역차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공정성, 평등 등의 말이 이러한 기이한 논리 구조 속으로 빠지게 되면서 우리의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흐려진다.

어느 때 보다 인권 규범에 대한 수준이 높아졌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의 일상회된 불안이 역차별 담론 가속화

신자유주의 시대 불평등의 심화는 복합적인 인권침해를 구조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 우리 사회에서 인권 담론 또한 팽창해온 것 역시 사실이다. 여러 인권의식조사에서 10, 20대의 인권감수성이 어느 세대보다 높게 나타나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권교육의 확산으로 그 어느 때보다 우리 사회의 인권 규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다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역차별 담론의 확산은 신자유주의적 사회가 낳고 있는 일상화된 삶의 불안이 이러한 권리 담론의 확산 과정과 만나면서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인권담론의 확산이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시민들의 인권의식을 높이긴 하지만, 그 신자유주의적 뒤틀림은 실제 나의 권리나 내집단의 권리가 다른 가치나 외집단의 권리와 상충하는 것으로 표상될 때는 나의 권리만을 가장 중요하게 방어하려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가 책임연구자로 진행한 ‘2019 대구인권의식실태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시대 인권교육의 확산은 사람들의 인권감수성을 비롯한 인권의식 전반을 상승시키지만 정작 현실에서 내집단의 이익과 인권적 가치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면 인권을 포기하는 경향성(낮은 인권헌신)을 제어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보여준다고 해석할 수 있다.2

인권을 수호하고자 하는 태도나 행동에서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주요한 요소이다. 무한경쟁을 사회 운영의 기본 원리로 만드는 신자유주의하에서 공감의 범위가 점점 축소되고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은 파괴되는 것은 어쩌면 예견된 일이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타자는 과거처럼 열등하기 때문에 배제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나와 우리 사회를 갉아먹는 존재, 차별이 어쩌구 하면서 ‘피해자 행세’를 하며 특혜를 바라는 불공정한 사회의 상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렇듯 자신의 특정 사회적 위치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산물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자신의 현재 경험만을 절대화하고 다른 이의 상황을 보지 않고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 사회의 문제는커녕 본인 삶의 불안함도 끝끝내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인권’ 자체를 차별의 상징으로 만들어가는 지경
역차별 주장 뒤에 놓인 근본 문제 ,함께 고민해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여성은 일직, 남성은 숙직을 담당하기 때문에 여성공무원 수가 늘면서 남성의 근무 시간이 점점 늘어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을 여성이 어려운 일을 피하기 때문에 발생했거나 여성에게 특혜를 주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오인하며 역차별 운운하는 것은 문제를 오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밤이 되면 여성이 자신의 안전을 걱정해야 하고, 직장에 나갔다가도 집에 돌아와 육아와 가사를 챙기는 것은 일차적으로 여성의 일이라고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숙직이 남성 전담 업무로 시작되었을 당시부터 지금까지 이런 근본적인 문제는 과연 얼마나 바뀌었는지 생각해보자. 진정한 성평등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양성 간 숙직을 공평하게 나눠하면 되는 그런 간단한 해결책이 아니라 그 현상 뒤에 놓여있는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고민하는 과정인 것이다.

지난 해 말 대구시가 인권조례를 개선하기 위해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지만 일부 보수개신교 단체를 중심으로 “동성애조장”, “이슬람화” 등의 터무니없는 민원폭탄이 쏟아지자 개정안 상정을 보류했다. 이에 대구시 인권증진위원회 위촉직 위원들은 대구시 결정을 규탄하며 전원 사퇴했다.

“소수의 인권을 위해 다수의 시민을 차별하는 조례다”, “동성애 처벌을 말하는 사람의 입을 막으려는 법이냐” 등에서도 알 수 있듯 왜곡된 역차별 담론은 이제 인권을 향한 모든 움직임을, 아니 인권 그 자체를 차별의 상징,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지경으로까지 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되면서 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이 불안해지고 있다. 모두가 여유가 없어졌다. 그러나 당장 눈앞의 내 몫만을 지키고자 상처 안에 고름을 보지 않고 봉해 버린다면 결국 내 삶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른 이들의 경험에 귀 기울이며 공감과 연대의 자세를 몸에 익힐 때 경쟁에 지친 우리 마음을 달래고 불안을 떨쳐낼 수 있지 않을까?

  1. 필자는 학생들의 보고서에서 논지를 벗어날 때 등장하는 말들 혹은 서둘러 결론을 내리면서 쓰는 말들을 특히 흥미롭게 보곤 하는데 예를 들어, 사회정책에 대해 분석하는 보고서라면 “콘트롤타워가 부재하다” 등이 남발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근거 없이 불쑥 등장하는 이러한 ‘엉뚱한’ 말들을 통해 해당 주제와 관련해 미디어 보도 프레임과 나아가 사회적 담론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육주원·신형진(2020), “인권의식 구성요소 간의 상관관계와 영향요인 분석.” 『사회과학 담론과 정책』 13(2): 211-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