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끝) 아직도 거창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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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연재>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 섣달그믐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2) 잠과 밥 / 설날 / 정월 초이틀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3) 피난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4) 청연학살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5)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①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6) 인정마저 앗아간 학살과 네 번째로 다녀온 저승의 문턱 ②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7) 다섯 번째 저승 문턱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8) 외갓집 / 봄은 왔는데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9) 탄량골, 박산골의 호곡성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0) 새로운 삶
[견벽청야(堅壁淸野) 푸른 밤에] (11) 박산골의 시신 수습 / 에필로그

▲2018년 7월 김운섭 거창사건희생자유족회장(왼쪽)을 만난 김수상 시인이 인터뷰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김성경 제공)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951년 육군 제11사단 9연대가 ‘견벽청야(堅壁淸野)’(말썽의 소지가 있는 곳은 초토화시킨다) 작전에 따라 경남 거창군 신원면 지역 양민 719명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공비와 내통했다는 이유였다. 1951년 3월, 신중목 의원에 의해 사건이 국회에서 거론되자 국회는 합동진상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계엄 민사부장이던 김종원 대령을 시켜 조사단을 습격하게 하였다.

파견된 국회조사단원에게 공비를 가장한 국군이 거창 신원면 입구에서 기총소사를 퍼부으며 조사를 무산시키려 하였다. 이후 들끓는 여론에 밀려 1951년 12월 관계자 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선에서 마무리했으나, 몇 개월 후 이들은 모두 사면받고 복권되었다. 517구의 시신은 박산골짜기에 방치되어 있다가 사건 발생 3년여 만에 시신을 수습할 수 있는 허가를 받게 된다. 신원면 주민들은 엉킨 뼈들을 크기로 남녀를 구분하여 화장한 후, 박산골 산기슭에 안장했다.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을 탄압하였다. 묘지도 개장령에 따라 다시 파헤쳐졌다. 그것도 모자라서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희생자들의 명예회복은커녕, 거창양민학살사건 유족들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였다. 유족들은 민주화 바람이 불어온 1988년이 되어서야 희생자 위령 궐기대회를 갖고 땅속에 묻혀있던 위령비를 파내어 다시 세울 수 있었다.

1996년 국회는 사건 발생 45년 만에 거창양민학살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해 ‘거창사건등관련자의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을 통과시켰으나, 배·보상 관련 조항이 제외되는 등 많은 미비점이 지적되었다. 정부 측은 이미 시효가 지나 국가 배상 의무가 소멸했다는 입장이나, 희생자 유족들은 공소시효를 특별법 제정 이후부터 산정해야 한다며 2001년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2002년에 일부 국회의원들이 거창사건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으며, 2003년 10월 서울대 법대 교수들은 명예회복만 규정한 현행 특별조치법을 개정, 인권침해에 대한 보상도 해야 한다고 촉구하며 법률개정안을 마련했다. 2004년 3월 실질적인 보상을 규정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사건이 재판에 계류 중이고 6·25전쟁 관련 배상 법안이 잇따라 통과되면 국가재정에 큰 부담이 된다”는 등의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하였다.

개정법안은 지난 제17대, 제18대, 제19대 국회에 연달아 제출됐다가 임기만료로 폐기되었다. 20대 국회에서는 희망을 가져보았으나 역시나 허사였다. ‘거창사건 및 산청·함양사건 관련자 배상 등에 관한 특별법안’으로 이름이 바뀐 이 법안은 2020년 5월 19일 열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에서 정부 반대에 부딪혀 부결되었다.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하고 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결국 자동 폐기되었다.

▲훼손된 박산골의 위령비. 5.16군사정권은 위령비의 글자를 정으로 쪼개 동강 내어 땅에 파묻었는데 1988년 2월 15일 다시 파냈다. (사진=김성경)

학살 사건 희생자와 유족에게 배상금과 의료지원금, 생활지원금 등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이 법의 제정에 가장 큰 난관은 ‘천문학적 배상금’에 대한 정부의 우려다. 거창사건 희생자의 유족들이 바라는 것은 거대한 추모기념관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에 의해 희생된 고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 국가로부터 정당한 배상을 받는 것이다. 추모공원의 이름도 ‘사건’이란 이름을 지우지 못한 채 ‘거창사건추모공원’으로 불리고 있다.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훼손된 위령비는 아직도 박산합동묘역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 훼손된 위령비를 언제 누가 바로 세울 것인가. 거창민간인학살 70주기에 물어본다.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학살된 김운섭 선생(당시 10세)의 가족의 실명(實名)은 다음과 같다.
어머니 故 신춘이 (당시 40세)
작은형 故 김운식 (당시 14세)
여동생 故 김운자 (당시 3세)
김운섭 선생의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큰형 바지저고리를 뜯어서 옷을 지어주셨고, 아버지는 짚신을 삼아주셨으며, 작은형은 죽기 며칠 전에 무명실로 양말을 짜주었다고 한다. 정성껏 짜준 양말은 작은형이 동생에게 준 설 명절 선물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