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감호론’을 부풀린 친명사대, “사드 배치 명분이 뭐요?”

[오늘을 읽는 역사] 백성보다 정치적 이념 선택한 친명사대부

18:07

“그깟 사대의 명분이 뭐요? 도대체 뭐길래, 이만의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라는 것이오. 임금이라면, 백성이 지아비라 부르는 왕이라면, 빼앗고 훔치고 빌어먹을지언정 내 그들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 갑절 백 갑절은 더 소중하오.”

▲영화 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사진=네이버 영화]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이다. 경복궁에서 신하들이 명에 대한 사대와 후금에 대해 논의하던 중 광해의 말이다.

1618년(광해군 10년) 후금과 명의 전쟁이 벌어진다. 당시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해준 대가로 파병을 요구한다. 광해군은 조선 상황을 이유로 파병 요청 거절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사신이 명 황제 칙서를 받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파병한다. 그러나 1619년(광해군 11년) 3월 심하(深河)에서 명·조 연합군은 대패한다. 파병군 도원수로 나섰던 강홍립은 후금의 후속 침략이 없도록 하라는 광해군의 뜻에 따라 전세가 기울자 후금에 투항한다.

심하의 패전으로 충격에 휩싸인 조선 조정에 후금 국서가 도착한다. 국서에서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의 파병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던 조선 사정을 이해한다며 예전 금과 고려의 우호 관계를 예로 들면서 후금과 조선의 우호 관계를 강조한다. 더불어 명을 응징하는데 함께 나서자고 했고, 강홍립도 후금과 화친할 것을 건의한다. 그러나 후금의 국서와 송환 포로 문제를 놓고 조정은 대립한다.

조정 내 다수인 친명파는 후금 국서에 대한 답변 불가 입장을 밝혔고, 송환 포로를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광해군은 후금 국서 즉각 답변을 명하면서 송환 포로 처벌도 거부했다. 대립 의견에 따라 절충된 답변서는 애매모호한 입장이 담겨있었고, 명과 후금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에 후금은 두 번째 국서를 보내고, 명과 후금 가운데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이에 광해군은 명의 의심을 받더라도 후금과 직접 대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런 와중에 명의 칙서가 조선에 도착했다. 칙서에는 패전 원인이 명 장수에게 있음을 분명히 인정하고, 조선을 위로했다. 그런데 칙서를 가지고 온 명 차관 원견룡(遠見龍)이 추가 파병을 요청하면서, 조선 조정은 다시 파병 논쟁에 휩싸였다. 원 차관의 임의 요청에 광해군은 ‘차관 말만 듣고 파병할 수 없다’는 것과 ‘나라를 방비할 수 없다’는 이유로 파병 불가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광해군의 노선에 반대했던 친명파 비변사(조선 중기 행정관청, 임진왜란 이후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기능함)는 파병 요구 수락을 주장한다.

이때 명 내부에서는 서광계(徐光啓)를 중심으로 조선감호론(朝鮮監護論)이 제기된다. 서광계는 조선과 후금이 내통할 가능성이 있으니, 조선이 재파병을 거부한다면 명 감호사를 조선에 보내 조선군 지휘권을 간섭해 후금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식을 접한 조선 조정은 다시 한 번 요동친다. 광해군은 서광계의 말이 사실이 아니니 사신을 보내 해명하도록 했다. 반면 비변사는 후금과의 모든 왕래를 끊고, 항복한 장수와 그 가족을 처벌하는 등 명이 의심할만한 모든 단서를 없애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조선을 의심하는 명 조정이 서광계 한 명이 아니라며 광해군을 압박했다.

그러나 <명실록> 등을 살펴보면 서광계의 조선감호론이 명 조정 내에서 무게감 있게 다루어지고 있지 않았다. 당시 명 조정은 정치력도 떨어져 있었고,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던 상황이었다. 이 상황에서 조선을 감호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었다.

또, 명 조정 내부의 당쟁으로 서광계의 모호한 위치다. 당시 서광계가 제안한 국방 관련 제안 대부분은 명 병부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명의 감호를 거부하더라도 명은 별다른 대책이 없었다. 오히려 조선 친명파가 이를 더 부풀린 것이다. 이후 광해군은 명에 사신을 보내 해명했고, 명 황제도 광해군에게 기존관계를 유지하는 내용이 담긴 칙서를 보내는 것으로 조선감호론 논쟁은 끝난다.

조선 친명파들은 왜 조선감호론을 부풀렸을까. 심지어 명 조정이 정한 방침도 아니었던 의견인데 말이다. 이는 친명사대 관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했던 신료들이 광해군의 외교 노선에 불만을 가졌던 탓이다. 이러한 상황을 두고 1621년 광해군은 한탄한다.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리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라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정초본] 광해 13년 6월 6일>

광해군이 나라를 보전할 수 있다고 했던 고려의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익히 잘 아는 압록강 280리를 획득한 서희의 외교 담판이 그 한 예다. 고려는 거란과의 분쟁지역에 추가적인 진출을 저지하는 수세적 방어 전략만으로 대응했다. 무력충돌과 같은 전략은 새로운 분쟁지역을 만들 우려가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고려는 당시 고려-송-거란-여진이라는 다원적인 국제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정보 수집과 치밀한 분석을 통해 대응 전략을 세웠다. 고려는 거란의 1차 침략 때 송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강동 6주를 얻었다. (993년, 광종 12년) 이후에는 거란 내부 분쟁을 이용하거나 송과의 외교관계를 재개하면서 거란을 압박했다. 이후에는 여진과 거란 사이의 마찰을 줄이는 등거리 외교 정책을 통해 실익을 추구했다.

명의 서광계가 제기한 조선감호론, 기존 친명사대 외교노선과 다른 광해를 압박하기 위해 이를 부풀린 조선의 신료들. 명 내부에서도 조선감호론을 실제 결행하기 어려웠던 사정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가만히 살펴보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과 흡사하다. 2014년 6월 커티스 스캐퍼로티 한미연합사령관 겸 주한미군 사령관이 “한국에 사드를 배치하도록 미국 당국에 요청했다”는 발언과 함께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2015년 4월 방한한 애슈턴 카더 미국 국방장관은 사드는 아직 논의 단계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리고 미국 대선과 한국 총선을 앞둔 2016년 2월. 한-미는 사드배치 협의를 시작했다. 북핵 대비용이라는 게 이유다. 그동안 미사일방어체계(MD)와 관련해 여론화 과정 없이 사드 배치 부지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동시에 한반도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남-북 협력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서는 반안보세력으로 매도했다. 군사적 실효성, 외교 관계, 사회적 합의 등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사드 레이더망에 포함되는 중국은 한반도 사드 배치 반대 의견을 발표했다.

신료들은 친명사대라는 충실한 이념으로 왕의 외교노선에 적극 반대 의견을 냈고, 결국 인조반정까지 이루어냈다. 그리고 얼마 후 후금은 광해군을 위해 보복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을 침략해왔다.(정묘호란) 서글픈 일이다. 대한민국 정부 내각 그 누구도 대북강경책과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이가 없다. 안보를 말하면서도 시민의 삶을 고려하지 않는다. 주된 고려 대상은 미국의 한·미·일 3국간 미사일방어체계 재편에 끌려가는 것뿐이다.

역사는 교훈을 얻는 거울이다. 조선시대 정책 결정권을 왕과 신료들이 가지고 있었다면, 대한민국 정책결정권은 국민이 가지고 있다. 다만, 헌법전 안에서 잠자고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