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재난의 시대, 교회의 사명을 묻는다 / 채형복

15:18

코로나19 확산세가 심각하다. 급기야 지난 일요일(8월 30일) 자정을 기해 정부는 수도권 지역을 대상으로 고강도 대책인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조치를 시행하였다. K-방역 시행으로 전 세계의 모범국가로 칭찬을 받고 있던 대한민국이 다시 위기에 빠졌다. 그 위기를 초래한 주체는 시민도 아니고, 정부도 아니다. 다름 아닌 교회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시민들은 정부가 방역과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기를 바란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방역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대면 예배를 강행하고 있다. 양측의 시각차는 지난달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기독교 지도자들 간의 면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문 대통령은 “방역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고 과학과 의학의 영역이란 점을 모든 종교가 받아들여야 한다”면서 기독교도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빨리 방역을 하고 종식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독교계 대표로 나선 김태영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 공동대표회장은 “종교의 자유는 목숨과 바꿀 수 없는 가치”라며 “종교의 자유를 너무 쉽게 공권력으로 제한할 수 있고, 중단을 명령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려서 크게 놀랐다”는 의견을 밝혔다.

문 대통령과 김 회장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종교의 자유와 그 한계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한교총 김태영 회장의 말처럼 방역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종교의 자유는 보장되어야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볼 권리도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공동체의 위기상황이다.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감염병이 우리 사회의 안전과 시민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는 이 엄중한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형제와 이웃이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고통으로 아우성인데 종교의 자유를 내세워 교회 탄압 운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현실에서 교회가 할 일은 무엇일까. 그 어느 집단보다 솔선수범하여 교회가 앞장서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극 실천하고 방역에 적극 협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코로나19가 하루빨리 종식되어 우리 모두 평온한 일상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문재인하야범국민투쟁본부 총괄대표 전광훈 목사 지지자들이 지난 1월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 앞에서 “종교 탄압 중단하라”, “전광훈 목사 탄압 반대”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보이며 전광훈 목사의 구속을 반대하고 있다. (사진=유성호 오마이뉴스 기자)

하지만 일부 교회는 여전히 현실을 외면하고 방역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이런 모습을 보며 오늘날 한국 사회는 교회와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헌법 제20조 2항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된다”는 정교분리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서울 성북구 사랑제일교회 담임목사 전광훈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 목사들의 무분별한 언행은 교회가 과연 이 원칙을 준수하고 있는지를 의심케 한다. 그들은 교회와 신도를 방패막이로 삼아 세상을 기독교의 적으로 돌리고 있지나 않는지 우려스럽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신학자인 엘륄은 그의 저서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 현대 세상에서 존재함>에서 이렇게 말한다.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먼저 그는 세상 안에 있고 또 세상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분리되거나 동떨어져 있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분리되는 것은, 하나님이 알곡은 취하고 가라지를 버릴 때, 즉 세상의 종말 시점에서 하나님이 하는 일이다.”

종교의 자유를 앞세워 대면 예배만을 고집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은 과연 세상 안에 있고, 세상에 머물고 있는가? 오히려 기독교와 비기독교, 교회와 비교회로 세상과 사람을 쪼개고 나누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 나라’를 내세워 자신들을 세상에서 분리함으로써 세상의 종말 시점에서 ‘하나님’이 하는 일을 감히 ‘피조물’이 하고 있지는 않은가? 엘륄은 기독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과의 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행동하라고 요구한다.

이 세상 안에 존재하고 머물면서 기독교인들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엘륄은 기독교인들이 성서가 자신들에게 부여한 다음 세 가지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너희를 이리 가운데 양으로 보낸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마리의 양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특히 ‘어린 양’이 주는 이미지는 순결과 희생, 그리고 고결을 연상케 한다. 역사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부정과 불의에 가득 찬 세상을 향해 온몸과 마음으로 저항하고 순교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고귀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낸 전능자의 심정이 이해되는 대목이다.

신은 목자를 자신의 대리인으로 세워 호시탐탐 어린 양을 노리는 이리로부터 그들의 목숨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목자는 신의 명령을 어기고 어린 양을 세상에서 분리하여 떼어놓고 있다. 아예 어린 양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게끔 거짓말로 회유하고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이다. 심지어 그들은 양들의 머리에 선민의식을 심고는 그들로 하여금 세상 사람들을 정신적으로 지배하고, 전제군주가 되도록 호도하고 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목자는 어린 양들을 이웃을 사랑하기보다는 세상의 적대자로 만들고 있다. 이것이 과연 “나는 너희를 이리 가운데 양으로 보낸다”는 성서 말씀의 참된 의미일까 되묻고 싶다.

기독교는 ‘인간의 이성’을 잃지 않고 헛된 상상이나 감정 혹은 욕망의 덫에 빠지지 않는 정신을 가지는 것을 중시한다. 물론 지나친 이성중심주의는 오히려 현대교회의 진보를 가로막고 있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프란시스 쉐퍼는 <이성에서의 도피>라는 책에서 개신교인들이 ‘이성으로부터 도피’했기 때문에 교회가 길을 잃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쉐퍼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라 ‘오직 성경’이라는 종교개혁가의 주장은 주의해야 한다고 본다.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율적이며,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했으므로 결코 자율적이지 못하다고 선언한다. 인간은 그리스도가 행한 사역을 오직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때 구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한 정현욱 목사의 말을 기독교인들은 주의 깊게 들을 필요가 있다. “쉐퍼가 말하는 ‘이성에서의 도피’는 세상을 바르게 보려는 ‘노력으로부터의 도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최초의 인류’ 아담과 하와는 터무니없는 욕망과 갑자기 높아진 감정에 굴복하여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 ‘인간의 이성’을 잃고 ‘참된 자유’를 잃어버리는 죄를 범했다. 그러나 이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천사 아브디엘은 사탄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다. 하느님에게 반역할 것을 결의한 루시퍼는 아브디엘에게 동료가 되자고 권한다. 그 말에 분개하여 아브디엘은 루시퍼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성이 폭력과 다툴 때, 비록 그 싸움이 야비하고 추할지라도, 이성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다.”

존 밀턴의 대서사시 <실낙원>이 묘사하고 있는 천사 아브디엘의 말처럼 나는 한국 기독교인이 충분히 이성적이라고 믿는다. 그 이성으로 야비하고 추한 야만의 폭력과 싸워서 언제나 이길 것을 믿는다. 이성과 폭력이 다툴 때 이성이 이기는 것이 당연한 이치로 이 땅에서 자리매김하리라는 사실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말을 하고 싶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부여한 이성의 밝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웃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고난에 눈 감지 말기를. 예수는 이 세상의 가난하고, 병들고 아프고, 억압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의 곁에 있었다. ‘오직 대면 예배’를 외치는 이 나라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의 곁에 있는가. 역사와 현실이 외치는 아픔에 귀 닫고 눈 감은 채 ‘그들만의 하늘나라’를 외치는 기독교인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