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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인권은 횡단보도다. 도로 곳곳에 있지만, 그 존재의 중요성을 쉽게 잊어버리게 되는 횡단보도. 하지만 횡단보도가 없는 도로 위에선 가장 약한 존재가 가장 먼저 위험에 처할 공산이 크다. 노인이나, 장애인, 아이들. 횡단보도 없는 도로 위에 섰다간 아우토반을 달리는 자동차들 사이에 선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굳어버리고 말 것이다. 조례를 통한 인권의 제도화는  우리 사회에 촘촘한 횡단보도를 놓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이 넘치고, 왜곡에 대응하는 사이 본연의 역할을 놓쳐가는 모습도 보인다. <뉴스민>은 전문가와 인권운동가, 시민 목소리를 통해 우리 사회의 횡단보도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인권조례, 횡단보도] ① 인권조례는 인권을 지키고 있을까
[인권조례, 횡단보도] ② 대구·경북 인권조례는 어디까지 왔나?
[인권조례, 횡단보도] ③ 복지시설에 갇힌 대구시 인권옴부즈만
[인권조례, 횡단보도] ④ 성희롱 시정 조치와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의 차이

“키는 작지만 거기는 큰 C 씨 인사해요”

2019년 12월 서울시의 한 투자출연기관 A 사업소의 회식자리에서 사업소 차장 B 씨는 부하직원 C 씨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성기를 지칭하는 듯한 표현으로 소개받은 C 씨는 당황스러움과 수치스러움을 느꼈다. B 씨는 그 자리에서 새로 발령 난 여성 신입 직원을 지칭하며 “여자라서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왔다”고도 말했다. B 씨의 성적 언동에 문제의식을 느낀 C 씨를 포함한 직원들은 이를 서울시 인권담당관에게 인권침해 사례로 신청했다.

2020년 ‘서울특별시 시민인권보호관 인권침해 결정례집’에 공개된 한 사건이다. 결정례집에 따르면 서울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는 조사 끝에 B 씨의 성적 언동을 사실로 인정하고 B 씨에 대한 인사 조처와 성희롱·성폭력 예방지침에 따른 의무교육을 받도록 조치했다. C 씨에겐 유급휴가 및 심리치료 제공 등 피해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도 하고 B 씨와 업무공간도 분리되도록 주문했다.

서울은 광주와 함께 인권증진조례에 따른 인권사업이 잘 시행되는 곳으로 꼽히는 지자체다. 시민 일반의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해 독립적으로 인권침해 사건을 조사하고 시정 조치도 하는 인권보호관을 두고 있고, 시는 인권전담부서도 운영한다. 인권보호관은 지역에 따라 명칭을 조금씩 달리하긴 하지만 역할은 다르지 않다.

서울의 경우 시민인권보호관을 상임과 비상임 합쳐 8명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로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를 구성하고 위원회가 각종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조사와 시정 조치를 결정한다. 광주는 대구와 같이 인권옴부즈만으로 부르지만 그 역할은 천지 차다. 1명뿐인 대구와 달리 상임과 비상임 합쳐 7명으로 구성한다. 역할도 복지시설 거주인으로 구제 대상을 한정한 대구와 달리 시민 일반을 상대로 광주시의 행정기관과 출자출연기관 등의 인권침해 문제를 들여다본다.

▲2020년 대구 동인 3-1지구 재개발 건물을 철거하는 포클레인. (뉴스민 자료사진)

서울 인권보호관, 최근 2년 인권침해구제 51건
주로 직장 내 성폭력 문제 치중
기존 감사관 제도와 역할 중복 문제 제기

서울은 2020년 A 사업소 사례를 포함해 모두 31건의 사건을 시정 조치했다. 그해 인권보호관들이 상담한 사례만 857건에 달하고 이 중 168건을 조사했다. 31건 중 당사자 동의를 얻은 28건을 결정례집을 통해 공개했는데, 21건(75%)이 직장 내 성희롱 사건에 해당했다. 피해자는 여성이 19명으로 위계(位階, 위치나 지위의 단계)에 의해 발생한 사건이 11건이고, 동료 간 발생 사건은 7건이다.

성희롱 사건 외에는 직장 내 괴롭힘(3건, 10.7%), 시간제·임기제 공무원 경력 불인정 사건, 공무원이 성소수자 혐오를 선동하는 글을 언론에 게재한 사건, 개인정보를 목적 외로 사용한 사건 등을 시정 권고했다. 2021년에는 상담 사례가 991건(전년대비 115.6%)으로 늘었지만, 조사 건수는 159건으로 줄었고, 시정 권고를 한 사건도 20건으로 감소했다.

광주도 서울과 마찬가지로 결정례집을 매년 공개하고 있다. 2020년 74건 상담 후 32건을 조사하고 3건을 시정 권고 내렸고, 2021년에는 상담 건수와 조사 건수는 각 58건(전년대비 78.4%), 25건(전년대비 78.1%)으로 줄었지만 시정 권고한 사례는 6건으로 2배 늘었다.

다만, 인권보호관의 역할은 각 지자체가 이전부터 두고 있는 감사 기능과 일부 겹치는 부분이 있다. 서울 시민인권침해구제위원회나 광주 인권옴부즈만이 시정 권고 조치한 사건의 많은 경우가 지자체나 산하 기관의 성희롱 사건이다. 성희롱을 포함한 성폭력은 정부가 엄격하게 제한하는 비위 행위로 주요 감사 징계 대상이다. 지자체의 인권보호관이 민간기관에는 사실상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걸 고려하면, 공공기관에 감사 기구를 하나 더 두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그럼에도 현행의 감사제도가 공무원들 간의 온정주의나 전문성 부재로 지적받는 만큼 의미가 있다는 의견은 나온다. 이명주 전 대구시 인권옴부즈만은 “감사실은 인권적 측면에 대한 전문가적 소견이 없다”며 “성 비위나 노동권 침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중대성을 판단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짚었다.

조성제 대구한의대 교수(경찰행정학과)는 “일부 중복되는 면이 있지만 공무원이 아닌 외부 인사로 운영하면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안을 밝힐 수 있다”며 “관계된 사람들이 누굴 더 신뢰할 것이냐고 할 때, 상대적으로 객관적, 독립적으로 구성된 인권보호관 같은 조직이 더 신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감사관 제도와 중복 있지만, 객관성·독립성 담보 장점
기존 규범, 제도로 해결 가능한 문제까지 ‘인권’으로?
“정작 필요한 건 규범만들 때 간과될 소수 권익 지키는 것”

반면 김해원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권력 기관장 입장에선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한 존재이긴 할거다.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견제 기능은 들어 있기 때문”이라면서도 “하지만 역시 ‘문제 있는’ 감사실처럼 활용될 여지도 없지 않다”고 우려했다.

김 교수는 “성희롱과 같은 문제는 기존의 법률을 적용하면 된다. 그런 쪽으로 인권보호관 제도가 사용된다면 기존의 규범 체계에서 해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며 “정작 필요한 부분은 다수가 규범을 만들 때, 간과되거나 소홀히 될 수 있는 소수가 없는지를 살펴서 조치를 할 수 있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다“고 짚었다.

조 교수도 “권리 침해 구제는 인권제도의 한 부분”이라며 “일반적인 정책이 인권감수성이나 시민들에게 인권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검토하는 걸 인권영향평가라고 하는데,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다만 정책은 다양한 사람이 관련되어 있어서 인권의 잣대로 영향평가를 하는 게 현재는 쉽지가 않다”고 말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인권보호관 제도보다 인권전담부서의 역할이 더 인권의 구체화와 제도화 측면에 중요한지도 모른다. 2013년 서울시가 인권담당관실을 통해 전국 최초로 주거시설 등에 대한 행정대집행 인권메뉴얼을 만들고 동절기에는 강제철거를 금지하게 하는 내용을 담은 것인 상징적이다. 2018년엔 서울시 차원에서 경찰과 법원에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 원칙을 이행해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광주는 인권전담 부서가 개별 부서의 정책 실행에 인권 침해 요소가 없는지를 살피는 인권영향평가 제도를 운영하는 것도 참고할 수 있다. 광주는 2017년 전남대학교 공익인권법센터와 업무지원협약을 맺고 새로운 조례를 제정할 땐 조례의 인권영향을 사전에 검토한다.

▲2020년 대구 중구 동인동 재개발 지역 강제철거 현장. (뉴스민 자료사진)

서울시 인권담당관실, 동절기 강제철거 금지 메뉴얼
광주 인권부서 2017년부터 인권영향평가 도입

서울시 인권담당관은 정무부시장 직속으로 인권정책팀, 인권보호팀, 인권협력팀, 인권영향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7명이 근무하면서 직원들에 대한 인권교육은 물론이고 인권영향평가제도도 담당하고 있다. 광주도 인권 업무를 전담하는 개별과(민주인권가)를 두고 그 아래 3개팀(인권정책팀, 인권교류팀, 민주정신선양팀)이 인권영향평가제를 포함한 업무를 보고 있다.

각각 2018년, 2020년 인권 업무 전담팀을 신설했지만 팀장을 포함해 3명만으로 구성한 대구·경북과는 양적·질적으로 큰 차이다. 대구, 경북의 인권팀은 이제야 겨우 인권기본계획을 세우고, 인권교육을 시작하는 수준이다. 서울, 광주만큼 인권보호관을 확대 운영하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다.

정해순 대구시 인권팀장은 “인권보호관 등에 관한 개정을 하려고 했지만 무산되면서 답보된 상황”이라며 “국회에서 인권기본법이 상정된 것으로 아는데, 그게 통과되면 상위법을 바탕으로 지자체의 역할이 열릴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과 광주가 인권전담 부서가 크고 구체적인 정책에 인권을 반영하는 노력을 할 수 있게 된 건 단체장의 의지가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시 인권보호팀 관계자는 “아무래도 단체장 의지가 작용하는 것 같다. 조직을 만들면 조례가 있어야 하고, 사업도 할 수 있는데 그 조직을 만드는 것 자체가 단체장 의지 없이 힘들다. 그만큼 예산도 확보되어야 한다”고 전했다.

이상원, 장은미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