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듯 같은 역사] 상처도 약한 곳이 먼저 터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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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음력 8월 2일, 조도사調度使 한덕원의 명령이 궁핍하기 이를 데 없는 예안현까지 내려왔다. 조도사는 특별한 목적의 비용이나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중앙에서 지방으로 파견되는 관리였다. 당시 한덕원은 경상도와 충청도, 전라도 삼도三道 조도사를 겸했는데, 시장과 어업, 소금, 부역 등 잡다한 지역 재정문제를 모두 관장하면서 광해군 시기 어려운 재정을 충당했다. 원래 조도사는 특별한 목적에 한해 그 일만 하도록 임명되는 자리였지만, 그는 마치 상시직처럼 근무하면서 지역을 들볶았다. 그런 조도사의 명령이었으니, 그 자체로 백성들 부담이 추가되었다는 의미였다.

이번 명령은 철물이었다. 경상도를 비롯한 각 지역에서 철물을 모아들이라는 명이었는데, 예안현에도 무려 1천 근이 할당되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1근을 600그램으로 환산해도, 미터법으로 600킬로그램에 달하는 양이었다. 요즘이야 철물 600킬로그램이 많은 게 아닐 수 있지만, 조선시대 철물은 제련하기도 힘들었을 뿐 아니라 대부분 농기구나 혹은 생활필수품처럼 특수 목적에 한정되어 있었다. 당연히 양이 많지도 않았을뿐더러, 일반 군현에서 이를 쉽게 구하거나 충당할 수도 없었다. 예안현 읍세를 생각하면, 600킬로그램은 재앙에 가까운 물량이었다.

철물을 거두는 이유는 인왕산에 새 궁궐을 짓기 위해서라고 했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이 완전히 불탄 상황에서 왕이 거처하는 궁궐을 새로 지을 필요도 있었고, 경우에 따라 경복궁 복원 계획도 세워야 했을 터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인해 불탄 경복궁을 대원군 때가 되어서 복설했는데, 이 때에도 궁궐 건축 하나로 국가 재정이 휘청거렸다. 궁궐 건축은 일반적인 국가 재정 규모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대규모 공사를 위해서는 반드시 백성들의 살림살이부터 살펴야 했다. 그러나 당시 광해군은 이를 따질 상황이 아니었다. 군주는 왕권을 상징할 정도의 규모있는 궁궐이 필요했고, 이러한 필요에 따라 경희궁 건설 계획이 세워졌다. 이제 지역별로 건축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해야 했다. 예안현까지 600킬로그램의 철물 요청이 내려진 이유였다.

그러나 이를 받아든 예안현 백성들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시 예안현 선비였던 김령의 기록에 따르면, 경상도에 할당된 철물은 1만 근이었다. 6톤의 철물이 경상도 전체에 할당되었는데, 그 10분의 1을 규모가 작은 예안현에 할당했으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당시 예안현보다 훨씬 규모가 큰 안동부도 3천 근, 즉 1800킬로그램 밖에 할당되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예안현에 대한 조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조도사 한덕원이 예안현의 사정을 전혀 모르거나, 아니면 예안현에 특별한 감정이 있어 예안현민들을 골탕 먹이려는 이유 외에는 생각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예안현에 발길도 한 번 하지 않았던 조도사 한덕원이 굳이 예안현에 나쁜 감정을 가질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러한 처사는 예안현 사정에 대해 전혀 몰랐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는 더 심각한 문제였다. 중앙에서 지역까지 조도사를 파견하는 이유를 한덕원은 몰랐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백성들에게 특별한 재정 부담을 부과하려면 먼저 왕명을 받은 관리가 직접 그 지역 형편을 고르게 살펴봐야 했다. 그리고 각 지역 사정을 감안해서 한도와 물량을 정해야 하는데, 이게 바로 조도사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덕원은 백성들을 닦달해서 물품을 거둘 줄만 알았지, 백성들의 사정을 살필 줄은 몰랐다. 예안현의 현실이 문제되지 않았던 이유였다.

이 와중에 백성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한 사람은 예안현감이었다. 안동부사는 3천 근을 할당받자마자 그 양이 너무 많다면서 조도사 한덕원에게 정문呈文(하위 관직에서 상급자에게 올리는 공문)을 보내 문제를 제기했다. 이렇게 되자 한덕원은 그 양을 반으로 깎아 1천5백 근만 내라고 했다. 수령의 말 한마디에 백성들 부담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웃 고을 영주는 이런 명령이 내려온 지 모를 정도로 관아에서 이를 조용하게 처리하고 있었으며, 예안현과 읍세가 비슷한 봉화는 수백 근만 할당되어 큰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예안현감만 맥이 없고 겁이 많은 탓인지, 그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생각할 여력이 없었다. 예안현 백성들 관점에서 보면, 예안현감은 조도사 한덕원과 한패였지 예안현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집집마다 고을의 아전들과 관리들이 들이닥쳐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이던가? 한창 가을걷이를 앞두고 농기구를 마련해야 하는 시점이었다. 이 때문에 안동부와 영주군, 그리고 봉화현은 철물을 거두는 시기를 조절하여, 백성들을 재촉하지도 않았다. 철물이라고는 생활 필수품과 농기구 밖에 없는 백성들의 사정을 생각한 조치였다. 그러나 예안현은 가을 걷이를 위해 마련해 둔 농기구마저 거두어 갔으니, 백성들 입장에서는 당장 가을걷이를 어떻게 할지부터 걱정해야 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궁궐을 짓겠다는 조정의 거대한 계획에 읍세가 가장 약한 예안현 백성들이 먼저 죽어나는 상황이었다.

며칠 무리하고 몸이 피곤하면, 몸살이나 감기 증세는 자신의 가장 약한 곳부터 찾기 마련이다. 코로나 19는 모두에게 ‘공평’했지만, 먼저 희생된 이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계층이었다. 정부가 ‘공평’하게 세금을 늘이면, 그 비명은 수익구조가 취약한 사람들부터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심지어 정부가 세금을 깎아도, 애초부터 세금도 낼 수 없는 사람들은 그 혜택의 대상일 수 없다. 그런데 하물며 조도사 한덕원처럼 지역 사정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폭압을 행사하면, 가장 먼저 죽어나는 이들은 예안현처럼 취약하기 이를 데 지역이다. 상처도 약한 곳이 먼저 터지고, 희생도 취약한 계층에서 먼저 나오기 때문이다. ‘공평’이 만능이 아닌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