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점핑클럽’, 입시로 통하는 롤러코스터를 거부하는 줄넘기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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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가 된 지 오래인 필자는 줄넘기 학원이 있다는 걸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제목인 <점핑클럽>은 아마 줄넘기 학원의 영문번역 표기일 테다. 줄넘기를 왜 학원을 다니면서 하는 거지? 라는 의문은 발육을 촉진해 키를 크게 하기 위함이란 것을 영화를 보다가 알게 되었다. 뭐든지 조기교육으로, 인위적으로 육성하는 과제가 되어버린 세태는 숫제 ‘우생학’이 구현되는 디스토피아로 여겨질 정도다.

줄넘기를 잘하지 못해서 체력장 때마다 서럽긴 했지만 과거에는 딱히 학원에 가서 돈을 주고 배워야 할 것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그저 잘 먹고 잘 자면 쑥쑥 클 것을 믿는 것을 넘어 유년시절부터 체형관리와 신체 사이즈 형성을 관리한다는 발상이 음산한 기운을 풍겨온다. 대체 이 영화는 어떤 차가운 미래를 상상하게 만들까? 호기심보다는 두려움을 간직한 채 진행되는 전개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리고 그 결과는 예상외로 유쾌하고 훈훈했다.

◆ 줄넘기에서 출발하는 여성 vs 남성 대결의 뿌리를 포착하다

▲[사진=영화 <점핑클럽> 스틸 이미지]

학원에서 강사의 지도에 따라 아이들은 여성 남성 구분 없이 한데 모여 정해진 구령과 음악에 맞춰 열심히 줄넘기를 하는 중이다. 다들 제법 솜씨가 만만찮다. 뭐 저렇게 집체적으로 줄넘기를 관리감독하면 좀 더 집중적으로 줄넘기를 잘하게 될 것 같긴 해 보인다. 특징적이라면 아직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또래 아이들이라 남자애들보다는 상대적으로 여자애들 키가 만만찮은 편이다. 줄넘기 실력도 더 나아 보인다. 이 연령대를 선택한 건 실제 줄넘기 학원의 주 수강대상이기도 하지만 여성 대 남성 신체적 능력치가 크게 다르지 않거나 성장이 오히려 여성이 빠른 찰나를 포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남자 강사는 흥미 겸 해서 여남 대결을 종종 붙인다. 하지만 그 또래 아이들은 승부라면 지고 못 사는 승부욕과 자존심이 강한 법이다. 척 봐도 줄넘기 잘하게 생긴 여학생 지호와 대결하게 된 남학생 유정. 두 아이는 시합에 나간 것 같은 자세로 죽어라 줄넘기를 한다. 줄넘기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없다. 강사는 과열되어 분쟁이 터지거나 아이가 쓰러질 걸 방지하기 위해 남자애에게 ‘사내답게 양보하라’는 주문을 거듭 내린다. 하지만 지호는 그런 강사의 태도가 불만족스럽다. 정당하게 승부를 겨루고 싶은데 항상 남자가 양보한다! 식으로 억지 논리에 의해 시합이 마침표를 찍는 현실을 납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본의 아니게 대범한 남자로서 양보해 준 타이틀을 획득한) 유정은 이름과 체구 때문에 남자애들 사이에서 놀림을 당하기 일쑤다. 또래 가운데 덩치가 큰 재준을 중심으로 한 무리는 그런 유정에게 무리한 요구를 일삼곤 한다. 위험한 미션을 수행하지 않으면 집단에 끼워주지 않겠다는 협박은 그 나이대 아이들에겐 심각한 실존적 위기에 다름 아니다. 우연히 지호는 유정이 남자애들 사이에 끼기 위해 무리한 요구를 억지로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훼방을 놓는다. 하지만 지호가 남자애들의 괴롭힘을 받지 않도록 도와주겠다는 은근한 제안을 유정은 거절한다. 그러다간 남자애들 사이에서 더 설 자리가 없을 것 같은 불안 때문이다.

◆ 아이들만의 해방구에서 살풀이처럼 행해지는 줄넘기

지호는 이럴 거면 굳이 줄넘기 학원에 더 이상 다니고 싶지 않다. 여성이라는 규정 때문에 늘 남자애들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규정되는 데 대해 근본적인 의문, 아니 분노를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그런 차별에 눈뜰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학원을 더 이상 안 나가고 싶다고 부탁하지만, 사정을 알 리 없는 엄마는 지호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다. 지호의 스트레스는 커져만 간다.

▲[사진=영화 <점핑클럽> 스틸 이미지]

학원에서 또다시 강사는 여성 vs 남성 대결을 붙이고 항상 그랬던 것처럼 남자애가 양보하는 식으로 결론을 지으려 한다. 지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벌떡 일어서 거세게 항의하고 학원을 나가버린다. 강사는 어안이 벙벙한 채 아무것도 대처하지 못한다. 곧이어 유정을 비롯해 다른 아이들도 엉겁결에 지호의 뒤를 따른다. 갑작스런 대탈주가 벌어진 셈이다.

평소에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마치 세상이 뒤집어지듯 몇 가지 상황이 추가로 발생한다. 유정에게 골탕을 먹이던 재준은 자신이 문방구에서 유정에게 시켰던 ‘서리(?)’를 저지르다 주인에게 발각되어 혼쭐이 난다. 평소에 으스대던 것과 달리 쭈구리가 된 재준을 또 다른 여자아이가 위로 겸 따끔하게 타이른다. 조금만 더 나이 먹은 아이들이라면 지나치게 급작스러운 변화라고 욕먹을 설정이지만 딱 그 또래 아이들이라면 가능할 법한 변화다. 그렇게 사건사고를 겪은 끝에 나머지 아이들은 지호와 유정이 있는 뒷동산 중턱의 운동장에 도착한다.

그동안 해묵은 감정을 풀고 요란스럽게 아이들을 찾는 부모의 전화를 살짝 꺼버린 아이들은 무한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저 흔한 뒷동산이 순식간에 아이들의 ‘해방구’로 변모하는 찰나다. 지호와 유정을 비롯한 아이들은 비로소 성별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되어 즐겁게 줄넘기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승부도, 그 어떤 반대급부도 의도치 않은 채 심신수련 겸 유희로서의 줄넘기에 몰입한 아이들의 표정은 해맑다.

◆ 어리다고 무시하지 말아요! 아이들의 주체적 결단

<점핑클럽>은 갓 초등학교 저학년 될까 말까한 아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소극이다. 하지만 마치 세태를 풍자하는 우화처럼 강렬한 주제의식을 함축하고 있는 작업이다. 남자애들은 여자애들이 드세다고 푸념한다. 여자애들은 남자애들이 턱도 아닌 벽을 치고 허세를 부린다며 경멸한다. 아이들의 툭탁거림으로 묘사되긴 했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오도된 성 대결이 발아하는 순간을 포착해낸 셈이다. 모든 문제는 바로 그 순간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학원 남자강사의 큰 고민 없는 게으름에서 탄생하고 마는 성차별은 결코 악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 테다. 그렇지만 키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배워나가야 할 아이들의 정신적 성장을 세심하게 고려하는 행위와는 거리가 아득하게 먼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기성세대의 무의미한 거리두기와 차별의 벽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대물림될 위험을 벌써 뿌려대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돌발적으로 터져 나온 지호의 일탈행동은 그런 어른들의 비합리적인 행태에 대해 우리 세대는 그러지 말자는 선언적 의미를 강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개별 행위라기보단 우화를 통한 교훈극 형태를 취한다. 그 나이대에 가능한 여와 남의 대등한 신체능력을 활용해 초반 지호 vs 유정 구도는 역전 혹은 전복적 면모를 강조하는 코드로 선명하게 각인된다. 작가의 명확한 의도에 기반을 둔 활용법일 테다.

▲[사진=영화 <점핑클럽> 스틸 이미지]

◆ <점핑클럽>이 선보이는 교육에 대한 통찰, 은근한 매운맛

영화는 단순히 두 소년소녀의 대립과 화해로 제한되길 거부한다. 초반에는 그리 드물지 않은 풋풋한 소년소녀 로맨스물처럼 흘러갈 듯 짐작되던 <점핑클럽>은 의외로 상징적인 주제의식에 따른 결말로 치닫는다. 후반부의 클라이맥스에서 영화는 명백히 학원 수강생 대다수의 집단적 해방이라는 ‘사변’으로 확장된다. 그 결정적 전환점을 선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감독은 과감한 형식 실험을 선보인다.

바로 상영 중에 화면비가 변경되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두 주연배우에 집중하던 화면비가 좌우로 넓어지는 때를 딱 맞춰 다른 여남 수강생 아이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렇게 둘 사이의 관계 개선과 상호이해 과정이 또래집단 전체로 전파되는 상징적 찰나를 뚜렷한 영화적 형식으로 구현하는 셈이다. 간단한 발상이지만 막상 실제로 실행할 때는 제법 망설였을 법한 장면이다.

아이들의 집단행동 순간에 당황한 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친다. 아이들을 그저 보호 대상이자 부모의 설계에 따르는 존재로 한정한다면 당연히 경천동지할 상황이긴 하다. 하지만 아이들의 대응은 부모들보다 더 성숙하고 건설적인 면모로 드러난다. 아이들이 ‘지금 순간에 전화는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를 실체적으로 구현할 때는 말 그대로 전복적 상황이 발생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테다. 귀엽게만 보였던 아이들이 펼치는 이 유쾌한 소극은 (수능이라는 희생제의가 다가오는 시점에서) 의외로 강렬한 메시지를 선명하게 펼친다. 적잖은 이들이 영화를 보고나면 뜨끔해질 법하다.

<작품정보>

점핑 클럽 Jumping club
2023 | 한국 | 드라마 | 19분10초
감독/각본 채지희
출연 최나린(이지호 역), 김서후(한유정 역), 유이찬(유재준 역),
오윤지(오현지 역), 문창준(줄넘기 학원 선생님 역)
촬영 고현석
배급 호우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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