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정치의 최전선으로서 재난 /김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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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4-08 09:46 | 최종 업데이트 2019-04-08 09:47

처음에는 불이 났다고 해서 일기예보가 맞는 말을 할 때가 있네 했다. 산불이 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내용을 언뜻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불이 순식간에 시내로 옮겨붙을 지경이 됐다고 하니 걱정이 돼서 잠을 이룰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렇게까지 초조해진 것은 산불이 시내로 옮겨붙는다는 것은 재난 영화에서나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해온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에 더해 2014년에 이어 우리 사회가 또 한 번 재난 앞에 실패를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우려를 키웠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최악의 조건 속에 번진 산불이 대형 참사로 이어지는 상상은 지금 해봐도 몸서리가 쳐진다.

다행히 정부와 소방당국의 일사불란한 대응 덕에 인명피해가 없지는 않았지만 최소화될 수 있었다. 재난 대응의 과정에서 이낙연 국무총리의 꼼꼼함에 많은 사람들이 감탄하기도 했다. 또 재난마저도 정치에 이용하려는 자유한국당 정치인들의 기이한 모습에 또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는 듯하다. 국가안보실 업무를 총괄해야 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국회에 붙들어 놓고 보내주지 않았다든지, 소셜미디어 등에 거의 가짜뉴스로 불릴만한 글을 올린다든지, 재난 대응에 바쁜 공무원들에게 야당 대표가 굳이 형식적인 브리핑을 받았다든지 하는 것들이 주요 소재이다.

물론 자유한국당의 이런 모습은 정치를 그야말로 저열한 수준까지 끌어내리는 것이라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좀 더 섬세한 잣대를 들이밀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자유한국당 소속 인사들의 이해할 수 없는 발언과 행위는 정치의 수단이어서는 안 되는 ‘재난’을 정치의 수단으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일까?

우리의 윤리 감각과는 달리 재난이 정치적 효과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단적으로 말해 당국이 재난에 잘 대응한다면 정부 여당은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정부의 재난 대응은 이전 정부의 그것과 비교 대상일 수밖에 없다. 납득하기 어렵다면 태풍 카트리나의 사례는 어떨까? 1천명이 넘는 사망자를 발생시킨 이 태풍은 미국 사회의 취약성과 이를 내버려두고 있는 기득권의 모습을 만천하에 드러내 공화당 정권에 심대한 타격을 입혔다.

산불 진압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던 요인을 따져보면 역시 재난이 정치적 문제로 다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어느 언론은 이 정부 들어 소방청이 독립하면서 독자적인 대응체계를 갖추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또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의 재난 컨트롤타워로서의 지위를 명확히 한 것이 관계 부처들의 능동적 대처를 가능케 했고, 시스템과 매뉴얼에 입각한 체계적 대응도 성공적으로 이뤄졌다는 청와대의 자기 평가도 있다. 이런 모든 요인들은 냉정히 따져 정치의 결과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한국당의 문제는 정치로 다루지 말아야 할 것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 문제를 반정치적으로 다루는 것에 있다. 자유한국당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는 크게 두 가지 의도가 실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가짜뉴스’를 믿는 것으로 정권의 상실감을 대신하고 싶은 지지층에게 결집의 수단을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둘째는 자신들이 정권을 맡았을 때의 가장 큰 실패 중 하나인 재난 대처 문제에 있어서 이 정권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억지로라도 부각시켜 ‘내로남불’ 구도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똑같이 재난 앞에 무능하다면 세월호 참사는 지금의 여당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된 것에 불과하다는 서사의 근거를 더 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재난의 정치적 측면은 어느 세력에 대한 유불리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과거 세월호 참사 때 나왔던 지적을 떠올려보자. 국가가 참사 당시 학생들을 제대로 구조하지 못하고 이후 실종자 수색도 지지부진했던 배경에는 해양사고에서 구조와 수색을 민간에 위탁할 수 있도록 한 수난구호법 문제가 있었다. 법의 이 조항을 근거로 해경 등 관계 당국이 민간 위탁을 전제하고 스스로의 구난 역량을 축소한 것이 참사를 키웠다는 게 당시 언론의 지적이었다.

▲산불 진화에 투입된 산불재난 특수진화대는 일당 10만 원을 받는 비정규직이다. [사진=산림청]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하지만 이번 정부의 재난 대응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노출됐다. 산에 들어가서 실제로 불을 끄며 산불 대응의 핵심을 맡는 산림청 소속 산불재난 특수진화대가 일당 10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제대로 된 안전장구 등을 지급받지 못하면서 과중한 노동을 해야 하는 상황에 노출돼있으며 그마저도 10개월 단위로 계약을 맺는 상황이라고 한다. 지난 1월 경남 김해에서 발생한 산불 진화가 제때 되지 않은 배경에 산불재난 특수진화대 대원들의 계약 만료 문제가 있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국가가 생명과 안전을 비용으로 보고 이것을 다루는 공적 영역을 민간에 떠넘기는 일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다. 반복되는 재난 대응을 둘러싼 논란은 적어도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당위를 다시 한 번 떠올리게 한다. 정부 예산은 더 공격적으로 편성돼야 하고 공공부문은 지금보다 더 확대돼야 한다.

물론 이것에 반대되는 견해와 주장과 철학이 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대립되는 가치관들이 서로 충돌하고 힘을 겨루면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한 정치다. 이런 것이 아니라 정치를 사람 사이의 감정, 어느 개인의 출중한 능력 혹은 무능, 불순한 의도와 공작 및 음모 등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정치가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자기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정치는 우리 사회의 문제 해결틀을 무력화하고 의미 없는 논쟁을 반복하도록 해 지금의 문제적 상황을 오히려 그대로 유지하게 만든다.

이런 일은 이제 우리 정치에 좌우를 막론하고 일반화되어 있다. 그나마 재난이라는, 우리의 삶에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문제에 이르러서야 그나마 정치를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열리는 게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재난이야말로 정치의 최전선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최전선에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실마리를 얼마나 찾아낼 수 있는가에 우리 사회의 미래가 달려있는 셈이다. 그래도 오늘은 반 발짝 정도는 나아갈 수 있게 된 기분이라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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