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교협 시사 칼럼] 추-윤 갈등과 ‘법 앞에 선’ 노동자 / 박충환

11:49

지난 10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국민의 오랜 염원이었던 공수처 설치와 검찰개혁을 향한 작지만 의미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참으로 지난한 여정이었다. 표적 수사의 전횡을 일삼아온 기득권 검찰의 조직적 저항과 보수 세력의 몽니는 검찰개혁의 필요성과 그에 대한 우리의 염원만큼이나 집요하고도 강력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과 그 가족은 개혁세력과 개혁저항세력 간 전쟁의 최전선에서 거의 멸문지화에 버금가는 고통을 겪었다. 안타깝게도 그 고래 싸움에 우연히 연루된 한 검찰 수사관이 자기가 속한 조직의 비수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비보를 접하기도 했다.

기득권 검찰과 보수 세력은 공수처 설치를 코앞에 두고 있는 현재에도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의 갈등이라는 점입가경 ‘법치주의’ 드라마를 연출하며 코로나19의 3차 대유행이 몰고 오는 먹구름보다 더 어두운 그림자를 한국 사회에 드리우고 있다. 이 법치주의 막장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여기저기서 죽어가는 노동자들의 부고가 끊임없이 전해지고 있다.

추-윤 갈등의 난맥상과 노동자들의 끊임 없는 죽음을 목도하며 오래전 읽었던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를 복기해본다. 1919년 발표된 이 짧은 우화의 플롯은 매우 단순하다. 법의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가 있다. 한 시골 사람이 문지기를 찾아와 법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청한다. 문지기는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 된다며 들여보내 주지 않는다.

시골 사람은 문지기가 허용할 때까지 일단 법의 문 앞에서 기다리기로 한다. 그는 문지기에게 뇌물을 먹이기도 하고 심지어 문지기의 옷에 기생하는 벼룩에게 청탁을 넣기도 하며 끊임없이 나중으로 유보되는 그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시골 사람은 결국 법 안으로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한다.

카프카는 예의 그러하듯 이 A4 용지 한쪽 분량밖에 되지 않는 짧은 우화에도 지극히 광활한 해석의 지평을 열어두었다. 여기서 굳이 텍스트의 비의적 중의를 파고드는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고담준론을 끌어오지는 않겠다. 누구나 이 우화의 문어적 외피만으로도 법의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를 오늘날의 판사, 검사, 관료, 변호사, 법학자 등 법률 전문가들로, 그리고 법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는 시골 사람을 일반 시민 혹은 노동자로 치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치환하면 지난 1년 가까이 우리 눈앞에서 펼쳐진 추-윤 갈등의 점입가경 법률 드라마는 카프카의 우화보다 더 중의적인 우화가 된다.

추와 윤은 비록 두 편으로 갈라서서 피 터지게 싸우고 있지만 둘 다 법의 문을 지키고 선 문지기이다. 법률 전문지식으로 중무장한 이 문지기들은 법치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끝이 보이지 않는 법률전쟁을 전개하고 있다. 어렵게 입을 연 대통령도 정치적 결단을 기다리는 시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절차적 공정성만을 주문하며 법치주의 뒤에 몸을 숨기고 있다.

법의 문지기들이 공수처법과 검찰개혁을 둘러싼 전쟁을 치르고 있는 동안 노동자들의 염원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본안으로 상정되지도 못한 채 표류하고 있고, 암암리에 개악된 노동법들이 속속 국회를 통과하며 자본권력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법을 모르는 ‘법 앞에 선’ 노동자들은 그저 문지기들이 법의 문으로 들여주길 하염없이 기다리며 여기저기서 죽어가고 있는 형국이다.

하지만 카프카의 우화와 달리 추-윤 갈등의 법률 드라마는 노동자 시민의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아야 한다. “법 앞에서”는 카프카 문학의 핵심인 현대 관료주의 비판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다. 이 우화에서 카프카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즉 법에 우선하는 정치의 근원성을 간과하고 있다. 정치는 법보다 더 근원적이다. 이는 신탁이 법을 대신했던 고대 제정일치 사회에서부터 진리였다.

고대사회에서는 하늘의 뜻을 읽는 전문가, 즉 샤먼이 신탁의 문지기와 통치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신성왕’이었다. 고대사회의 인민들은 신성왕을 주기적으로 살해하여 그 피를 숲에 뿌렸다. 인민의 풍요로운 삶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인 숲의 근원적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해서였다. 다시 말해 고대의 인민들은 종교적 의례의 형태로 신탁의 문지기를 교체하는 정치적 실천을 통해 삶의 풍요성을 주기적으로 회복했다. 이것이 바로 제임스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상세하게 묘사하는 ‘신성왕 살해’ 관습이다.

인류 사회의 시원적 형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치의 근원성은 현재에도 변함이 없다. 단지 신탁이 법으로 대체되고 주권이 행사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자본이 죽은 노동의 축적이듯 법은 죽은 정치의 누적이다. 추-윤 갈등의 ‘법치주의’ 드라마에서는 죽은 정치가 산 정치를 압도하고 있다. 그래서 위험하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절대 망각하지 말아야 할 진실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을 법의 문지기로 세운 것은 법이 아니라 촛불을 든 시민들의 정치적 실천이었다는 것이다.

대다수 시민은 법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다. 그래서 법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럼에도 그들은 법을 등에 없고 전횡과 농단을 일삼던 문지기들을 법 밖에서 내쳤다. 촛불혁명은 법 앞에서 임종을 맞기를 거부한 노동자 시민의 정치적 행위였다. 법 앞에 있다는 것은 곧 법 밖에 있다는 뜻이다.

촛불혁명의 시민은 앞으로도 자신들이 세운 문지기들이 법의 문을 열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지 않을 것이다. 한번 문지기를 내쳐본 경험이 있는 그들은 카프카의 시골 사람처럼 법 안으로 들어가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다 임종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가 바로 서고 법이 바로 서지 않을 때 그들은 법 밖에서 법의 문지기들을 교체해버리거나 법의 문 자체를 허물어 버릴 것이다.

▲지난해 9월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과 서울중앙지검 앞 도로에서 열린 검찰개혁 촉구 촛불집회 현장. (사진=권우성 오마이뉴스 기자)

조만간 정해진 ‘법적 절차’를 밟아 공수처가 발족할 것이고 추-윤 갈등의 법률 드라마도 언젠가는 종식될 것이다. 그러면 지난 수십 년간 법과 권력의 부조리한 착종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온 검찰 권력에 최소한의 고삐를 달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노동자 시민에게 법의 내부가 허용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지기들은 여전히 법의 문 앞에서 “지금은 안돼, 나중에”라고 준엄하게 속삭이며 권위를 세울 것이다. 하지만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만큼이나 죽은 정치가 산 정치를 구축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법치주의라는 법적 논리가 아니라 시민과 노동자들의 평안한 삶을 지상 과제로 삼는 정치의 회복이다. 문재인 정부의 문지기들은 더이상 법치주의의 허상 뒤에 숨지 말고 당당히 나와 살아 있는 정치를 하라! 멸문지화를 당하더라도 그렇게 하라! 그것이 촛불시민이 당신들에게 내린 지상 명령이다.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법 앞에 선’ 노동자 시민들의 혈관 속에 도도히 흐르고 있는 뜨거운 정치적 에너지가 다시 폭발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