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부 ‘원폭 투하’ 책임 묻는 재판, 소송비용 문제로 각하한 법원

2017년 원폭 피해자 조정신청 후 4년
미국 정부 입장 한 번 듣지 못하고 종료
“재판부 예단 갖고 재판 진행한 것 아닌가”

20:01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원폭을 투하한 미국 정부와 원폭 제조 및 투하에 기여한 기업을 상대로 제기된 소송에서 우리 법원이 사안의 본질은 다루지 않은 채 소송비용 공탁 문제를 이유로 각하 결정한 사실이 뒤늦게 확인됐다.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4민사부(부장판사 김양호)는 지난 4월 30일 소송을 제기한 원폭 피해자들이 재판부의 소송비용 담보 제공 명령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행하지 않았고, 소송 지연 등을 이유로 변론 없이 사건을 각하했다.

2017년 처음으로 미국 정부와 원폭 제조사 등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가 시작된 후 4년 만에 당사자들에게 답변 한 번 듣지 못하고 허무하게 정리된 셈이다. 허무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지난 4년은 지난한 시간이었다.

2017년 원폭 피해자 조정신청 후 4년
미국 정부 입장 한 번 듣지 못하고 종료

▲지난 2017년 한국원폭피해자들이 미국 정부 등을 상대로 조정신청을 하면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형률 씨의 아버지 김봉대 씨, 한정순 한국 원포 2세 환우회 부회장, 최봉태 변호사, 박경로 변호사, 구인호 변호사.

소송은 2017년 8월 한국 원폭 2세 환우회 당시 부회장 한정순(62) 씨와 원폭 2세대 피해를 사회에 알린 고 김형률(2005년 사망) 씨의 아버지 김봉대(83) 씨와 어머니 이 모(81) 씨, 3세대 피해자인 한정순 씨의 아들(38) 등이 대구지방법원에 조정신청을 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미국과 한국 정부를 비롯해 미국 군수산업체 듀폰(E. I. du Pont de Nemours and Company), 보잉(The Boeing Company), 록히드 마틴(Lockheed Martin Corporation) 등 원폭 제조와 투하에 책임 있는 기업체를 조정대상으로 삼으면서 단순히 물질적 배상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들이 처음부터 민사소송 대신 조정신청을 했던 것도 물질적 배상에 목적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미국과 군수산업체가 원폭 투하에 대해 사과하고 피폭자에 대해 미국 정부가 축적한 자료를 공개할 것을 바랐다. 소송대리인단장을 맡은 최봉태 변호사는 조정 신청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소송을 통하면 피고가 원고에게 얼마 배상하라는 판결 외에 다른 요구에 대한 판결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돈을 받겠다는 것 외에 진상 규명과 관련된 내용, 사죄 같은 것이 더 와닿는 것이어서 조정신청을 했다”고 설명했다. (관련기사=한국 원폭 피해자들, 미국 정부-록히드 마틴 상대로 원폭 위법성 따진다(‘17.8.3))

법원은 2017년 9월 한 차례 조정 기일을 열었지만, 피고 모두가 참석하는 자리는 아니었다. 미국 정부와 군수산업체에는 조정신청서가 송달조차 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피고 중에선 한국 정부를 대리하는 변호사만 조정 기일에 참석했다. 재판부는 “사안의 성격상 조정을 하기엔 쉽지 않은 것 같다. 조정에서 다룰만한 사안인지 양쪽 의견을 들어보고자 한다”고 당사자 모두가 참석하지 않은 기일을 잡은 이유를 설명했다.

이 자리에서 우리 정부의 변호인은 “수임한 지 얼마 안 돼서 정확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성질상 조정이 어렵지 않나 생각한다”며 ‘조정이 어렵다’는 취지의 발언만 여러 차례 반복했다. 그걸로 끝이었다. 약 20분 만에 재판은 끝났고, 이것이 지난 4년 동안 이 사건으로 열린 유일한 재판이다. (관련기사=‘원폭 피해 구제’ 첫 조정 재판 열려…정부, “조정 어렵다” 반복(‘17.9.18))

▲2017년 첫 조정 재판을 마칭고 나온 후 최봉태 변호사(제일 왼쪽)와 피해자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판결도 전에 피해자들에게 비용 담보 명령
“법원, 예단 갖고 재판 진행한 거 같아”

재판부는 두 달 뒤(11월 27일) 다른 피고들의 입장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조정불성립 결정했다. 그해 12월부터 본안 소송이 시작됐다. 본안 소송에선 손해에 대한 배상 문제만 다퉈질 수밖에 없지만 다른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론은 더 나빴다. 2017년 12월부터 지난 4월 각하 판결까지 미국 정부나 군수산업체 측에는 조정 때와 마찬가지로 소장조차 전달하지 못하고 종료됐다.

본안 재판부가 각하 판결을 한 것도 쉬이 납득되지 않는다.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김영민 변호사(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 대구지부 인권센터장)는 “통상적으로 민사소송의 비용은 패소한 측에서 치르게 되는데, 사안에 대한 다툼 없이 원고 측에 소송비용 담보 명령을 한 건 법원이 예단을 갖고 재판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더구나 해당 재판부는 지난 3월 전임 재판부가 내린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정부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것에 반하는 결정문을 이례적으로 내기도 한 재판부여서 의구심을 더한다.

앞서 1월 8일 김정곤 부장판사가 근무하던 동일 재판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에서 원고 측 손을 들어주면서, 소송비용도 일본 정부가 물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해당 판결은 일본 정부가 국제법 위반이라며 소송에 대응하지 않으면서 확정됐다.

그런데 법원 정기 인사로 김양호 부장판사 등으로 바뀐 재판부는 “이 사건 소송비용을 (일본 정부에) 강제집행하면 국제법을 위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해당 사건에 대해 국고에 의한 소송구조 추심 결정을 내렸다.

이상원 기자
solee412@newsm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