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흔들리는 너클볼처럼 ‘야구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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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96년 의학적으로 남성이 아닌 자는 부적격 선수로 분류하던 규약을 삭제했다. 통념상 남자들만의 운동경기로 여겨져 온 야구에서 남자가 아닌 여자도 프로선수가 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프로야구는 여전히 남성의 전유물로 통한다.

야구에서 여자선수가 등장한 것은 꽤 오래전이다. 1922년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범경기에서 아메리칸리그 올스타팀 1루수로 여자선수 리지 머피가 등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에서 메이저리그 선수 중 상당수가 징용되어 전장에 나가면서, 구단들은 여자 야구선수들을 기용해 ‘그들만의 리그’를 조직했다. 명맥은 여자 세미 프로팀 콜로라도 실버불리츠가 잇고 있다. 왼손잡이 투수 일라 보더스는 1994년 사상 첫 대학 경기에 등판하고 1998년에는 마이너리그에 처음으로 입성했다.

일본에서는 1995년부터 대학야구에서 여자선수가 출현해 주목받았다. 국내에서는 중학교 3학년생 안향미가 최초 여자 야구선수로 기대를 모았다. 안향미 씨는 1997년 고교 진학을 앞두고 체육특기생 자격을 얻지 못해 프로야구선수 꿈이 좌절될 위기를 겪었다. 교육위원회가 인준하는 체육특기생 종목에서 야구는 여자 운동경기에서 제외됐기 때문이다.

안향미씨는 교육위원회에 애타게 탄원서를 제출한 끝에 덕수정보고에 진학했다. 유망주 안향미씨는 1999년 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 준결승에서 덕수정보고 투수로 마운드에 올랐다. 국내에서 야구가 도입된 이래 처음으로 KBO 공식 경기에 출전한 여자선수였다. 2004년 3월에는 한국여자야구단 ‘비밀리에’가 창단됐다. 안향미 씨가 감독 겸 선수로 나섰다. 현재 여자야구단은 10개가 넘는다.

이처럼 여자 야구선수는 생소하지 않지만 국내 프로야구에서 여성이 뛴 적은 없다. 안향미 씨도 프로 입단 테스트에서 탈락했다. 어릴 때는 남녀의 물리적 차이가 크지 않지만, 성인이 될수록 힘이나 체력, 속도의 측면에서 격차가 벌어진다. 어려서 두각을 나타내면 여자 야구선수라는 희귀성 때문에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정작 성인이 되어서는 반대로 여자 야구선수의 존재가 옅어진다.

<야구소녀>는 안향미 씨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주인공 주수인(이주영)이 고교 야구부에 남자 라커룸만 있는 탓에 화장실 맨 끝 칸에 자신만의 탈의실을 마련한 것도 여자선수들의 현실에서 따온 설정이다. 영화는 남녀의 신체적 차이와 사회적 차별의 경계선이 흐릿해지게 만든 24년 전 규약에 질문을 던지면서 출발한다.

수인은 어릴 적부터 천재 야구소녀로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최고 구속 134㎞에 볼 회전력도 뛰어나다. 그의 실력은 아마추어나 여자 야구계에서는 엄두 내지 못할 정도지만, 프로 무대에서 통하지 않는다. 수인은 프로 선수 선발 테스트를 치르기 위해 물집이 터지고 손끝에서 피가 날 정도로 훈련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다. 주변에서도 수인을 만류한다. 수인의 꿈은 한심하고도 철없는 고집으로 치부되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주어지지 않는다. 공인중개사 시험에서 좌절한 아빠(송영규)와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리는 엄마(염혜란) 사이에서 수인이 할 수 있는 선택은 현실적일 수밖에 없다.

비관적으로 흘러갈 것으로 짐작되던 이야기는 뜻밖의 우회로로 향한다. 수인의 뚝심은 주변을 설득해내고, 프로 입단 테스트를 치른다. 수인의 강점을 발견하고 키워준 야구부 코치 최진태(이준혁 분)의 가르침과 야구로 자신을 앞지른 친구 정호(곽동연)의 응원, 무능력하지만 다정한 아빠의 위로가 수인이 꿈을 이루는데 힘을 보탠다.

영화는 공평한 기회와 프로의 냉정한 현실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막판까지 균형을 유지한다. 수인과 주변 인물들의 진심 어린 분투를 차분히 따라간다. 연출로 쉽게 흥분하거나 감동하지 않고 인물과 같이 호흡한다. 덕분에 비장한 배경음악이나 뜨거운 환호성 없이 긴장감과 흥분, 감동을 이끌어 낸다.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끝이자 시작을 말하는 결말을 보여준다. 이는 너클볼로 상징되는 돌파구로 견고한 벽에 균열을 낸 수인이 더 큰 세상에서 소수자이자 편견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전 해보지도 않고 포기 안 해요.” <야구소녀>는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인 최윤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먼저 선보여 호평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