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결핍이 초래한 대혼돈,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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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우주는 최신 우주론이다. 인류가 머물고 있는 우주가 다양한 전체 중 하나의 요소나 원자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결과가 초래될 수 있는 우주들이 11차원이라는 확장된 시공간 속에 함께 존재한다. 더 나아가 평행우주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포함해 무수히 많은 우주가 동시에 존재한다고 본다.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는 다중우주를 통해 영웅의 한계를 확장해왔다. 선악의 이분법 구조에 갇힌 영웅은 변화 없이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럴 때 다른 순간의 조건과 선택으로 인해 다른 존재가 된 영웅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영웅들의 단편을 넘어 등장인물이 모두 모인 총력전까지 다루면서 팬덤을 형성했다. 이후 영웅들이 등장한 단편들은 인기가 시들었다.

다시 이목이 집중된 건 다중우주를 통해 전·현직 스파이더맨을 한데 모은 <스파이더맨:노 웨이 홈(2021년)>이었다.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는 다중우주를 본격적으로 선보인 영화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우주는 73개다. 사뭇 다른 모습의 닥터 스트레인지(베네딕트 컴버배치)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아메리카 차베즈(소치틀 고메즈)와 함께 도망치다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게 당한다. 악몽에서 깨어난 닥터 스트레인지는 타노스의 침공 이후 가족과 연인 크리스틴(레이첼 맥아담스)을 잃고 상실감에 젖어 살아가고 있다.

차베즈가 괴물에게 쫓긴 이유는 다중우주를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이고, 닥터 스트레인지는 악의 세력으로부터 차베즈를 구하기 위해 완다 막시모프(엘리자베스 올슨)를 찾아간다. 하지만 완다는 가족을 잃은 상실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마녀 ‘스칼렛 위치’로 타락한 상태였다. 차베즈를 쫓은 괴물도 완다가 보낸 것이었다. 완다는 차베즈의 능력을 이용해 다중우주에서 가족을 만날 계획이다. 차베즈를 넘기라고 협박하는 완다에게 맞서다 처참하게 패배한 닥터 스트레인지와 차베즈는 또 다른 다중우주에 불시착한다.

영화의 배경이 다중우주인 만큼 시각 효과가 독특한 편인데 장르도 다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의 상실감을 표현할 때는 드라마였다가, 초능력자들 간 대결은 전형적인 오락물이었다가, 완다의 추격은 호러물로 그려진다. 공포영화의 대가로 통하는 샘 레이미 감독이 연출한 덕분이다.

그는 데뷔작 <이블 데드(1981년)>로 흥행과 비평 모두 성공을 거뒀고 잔혹한 묘사가 즐비한 ‘스플래터 영화’를 B급 오락영화에서 메이저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또 배우 토비 맥과이어가 출연했던 <스파이더맨 트릴로지>를 연출하고 <그루지 시리즈>, <드래그 미 투 헬(2009년)> 등 호러물을 연출하고 제작해왔다. 그의 연출은 <닥터 스트레인지:대혼돈의 멀티버스>에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꽤 간결하다. 타노스와 대적하다가 연인을 잃고 마법으로 만든 자식들이 사라진 뒤 자식들이 건재한 다중우주에서 자식들과 함께 행복한 일상을 보내려는 완다는 공들여 준비한 계획을 포기한다. 닥터 스트레인지 역시 헤어진 연인과 다시 재회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결핍을 메꾸려 헤매지만, 끝내 이를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허를 억지로 채우려 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이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