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싱크홀’이 놓친 재난영화의 덕목

09:24
Voiced by Amazon Polly

재난영화는 보통 화려하고 대규모 장면이 동반된다. 화산이나 지진, 태풍, 토네이도, 쓰나미 등 자연재해는 한 도시와 국가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외계인 침공이나 거대 생물 또는 좀비의 습격은 전 인류가 멸망할 정도로 위협적이다. 때문에 재난영화에 쓰이는 CG는 규모가 다르다.

1996년에 개봉한 <인디펜던스 데이>는 외계인들의 지구파괴를 주제로, 이보다 2년 뒤 개봉한 <딥 임팩트(1998년)>는 운석충돌을 당시 수준에 비춰 실감나는 CG로 선보였다. 상상이 아닌 실재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영화도 있다. <트위스터(1996년)>는 미국의 토네이도를, <더 임파서블(2013년)>은 2004년 12월 인도양 지진해일을 배경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재난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실화 바탕이거나 화려한 볼거리가 아니다. 재난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관객을 설득하는 일이다. 엄청난 대재앙을 직접 보이지 않아도 가능하다. <오픈 워터(2003년)>, <더 캐년(2009년)>, <127시간(2010년>, <그래비티(2013년)>, <올 이즈 로스트(2013년)>는 개인에게 국한된 재난을 그린다. 인류가 어쩌지 못하는 대재앙을 앞두고 연대감을 느끼고, 휴머니즘을 자아내는 재난영화들과 다르다. 한두 명의 인간이 우주, 바다, 계곡 같은 곳에 홀로 남아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악전고투를 벌인다.

휴머니즘도 화려한 CG도 없는 이 영화들이 호평은 얻는 이유는 억지가 없는 사실감 때문이다. 스킨 스쿠버를 하던 부부가 상어가 지나다니는 바다 한가운데 남고, 그랜드 캐니언에 놀러 간 신혼부부가 길을 잃고, 홀로 계곡과 암벽을 누비던 탐험가가 바위에 손이 끼이고, 우주에서,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인간이 겪는 고난과 역경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렸다.

그런 측면에서 <싱크홀> 속 재난은 엉성하고 작위적이다. 동원(김성균)은 11년 만에 자신의 집을 마련한다. 아파트보다 투자 가치가 떨어지는 빌라이고, 은행 빚이 무거워도, 서울에 입성해 장거리 출퇴근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만족한다. 아내 영이(권소현)와 아들 수찬(김건우)과 여유도 만끽하고, 고급 가구를 장만하는 사치도 부려본다.

하지만 집 안을 비롯한 건물 곳곳에서 ‘하자’의 징후를 발견한다. 그리고 집들이 날, 전날 장대비 속에서 생긴 싱크홀 때문에 빌라가 땅속으로 추락한다. 동원과 함께 싱크홀에 빠진 이들은 빌라 주민 만수(차승원)와 동원의 집들이에 온 회사동료 김 대리(이광수), 인턴 은주(김혜준)다. 이들은 영웅적인 기질을 발휘해 극한의 상황에서 살아남는다.

<싱크홀>의 영화적 상상력은 터무니없지 없다. 싱크홀은 최근들어 한국에서 자주 발생하는 재난이다. 심지어 <싱크홀> 개봉 당일 밤 10시 50분쯤 대구 동구 안심역 근처 도로에서 지름 10m, 깊이 7m의 거대한 싱크홀이 발견되기도 했다.

문제는 영화에서 재난을 풀어내는 과정과 방법이 어처구니없다는 점이다. 동원 일행이 빠진 싱크홀의 깊이는 500m에 달한다. 지상에서 내려 보낸 드론의 신호가 끊기고 생존자들에게 닿을 로프도 없다. 그런데 암석 층층이 부딪히면서 떨어진 빌라는 곳곳이 부서지고 깨졌지만 형체는 그럭저럭 멀쩡하다. 빌라 한 동이 통째로 떨어지는 장면 자체의 CG가 엉성해 몰입을 방해한다. 영화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작위적인 수준이 너무 심각하다.

사고 이후 생존자 간 인과관계 변화를 나타내는 플롯도 엉성하다. 김 대리와 은주, 동원과 만수 사이의 변화가 대표적이다. 플롯의 빈틈을 배우들의 연기로 메우다보니, 연기력이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가 감정 과잉으로 느껴진다. 초반의 코미디는 전형적이고, 중반의 재난은 예측 가능한 시점에 일어난다. 후반의 감동은 다소 깊이가 얕다.

영화는 부동산 지옥을 견디는 한국인의 삶을 서사의 밑절미로 삼는다. 김지훈 감독은 500m 싱크홀 설정과 관련해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깊이, 위를 올려다봤을 때 까마득한 느낌을 주는 깊이, 희망을 찾기 어려운 깊이가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새삼스러울 것 없지만, 집이 문제다. 집이 안락한 공간이 아니라 불안정성을 야기하는 거대한 싱크홀이자 인생 전체를 결정짓는 등급이 된다.

갑작스러운 재난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유쾌 발랄한 생존기보다는, 5층짜리 빌라를 삼킨 싱크홀의 발생 원인인 참사의 사회적 원인에 관심을 두는 게 더 현실적일 것이다. ‘도심 속 싱크홀’은 대부분 상하수도관 문제나 무리한 굴착공사 등 인위적인 이유로 발생한다.

관객의 울분을 자극하는 분노를 끌어낼 필요는 없다. 치솟는 집값으로 수도권의 연 소득 대비 주택가격(PIR) 배수를 빗대어 표현해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월세에서 전세로, 전세에서 자가로 올라가는 게 쉽지 않은 한국인의 재난과도 같은 현실이 싱크홀에 빠진 절망감에 중첩될 것이다. 하지만 집을 얻는 대신 빚쟁이가 되는 또 다른 ‘재난’도 영화에선 가볍게 묘사된다.

영화에선 동원 일행이 우여곡절 끝에 지상으로 올라온다. 500m나 가라앉아 있다가 폭우로 싱크홀에 물이 차면서 기압의 문제도 없이 기적적으로 구조된다. 영화는 진흙 통닭구이와 폭죽놀이를 구경하는 것으로 끝난다. 하지만 집 때문에 생긴 동원 일행의 재난은 이제 시작이다.

손선우 전 영남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