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053] ‘야행성’, 불면의 밤, 사연 있는 소년과 소녀가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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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보다 롯데리아가 더 편한 아이들 이야기

단편 독립영화 <야행성>은 위태로운 10대의 불면증에서 출발한다. 18살 소년 해원은 학교에서 늘 잠만 잔다. 오죽하면 담임이 자는 해원을 깨운 뒤 ‘자는 모습 말고는 본 적이 없다!’며 한탄할 지경이다. 그 정도로 학교에서 깨어있는 모습을 보기 힘들지만, 특별히 비행청소년이거나 일탈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해원은 노래방을 운영하는 엄마(희정)와는 원만한 모자관계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도 노래방에 들러 노래는 부르지 않고 영화를 본다. 하라는 노래는 안 하고 소파에 드러누워 잠만 자는 손님을 어렵사리 깨워서 보내고 엄마와 함께 귀가한다.

▲[사진=영화 ‘야행성’ 스틸 이미지]

아파트 계단 아래엔 (범죄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사건사고 피해자 위치를 지정하는 표식이 새겨져 있다. 엄마의 말을 들어보니 얼마 전 노래방 단골인 15층 아저씨가 자살했다고 한다. 이제 홀로된 15층 아저씨네 집 딸이 해원과 같은 학년 동갑이라며 엄마는 누군지 혹시 아냐고 묻지만, 해원은 아는 게 없다. 엘리베이터에서 모자는 남편이자 아빠와 만나게 되지만, 가족 상봉인데도 어째 분위기는 찬바람 가득하다. 아빠는 가족을 돌보지 않고 엄마와는 사실상 별거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답답해하던 해원은 늦은 밤에 바깥바람 쐬러 나갔다가 자살자 표식 자리에 누워있는 또래 소녀 하영을 발견한다.

▲[사진=영화 ‘야행성’ 스틸 이미지]

둘은 며칠 후 동네 롯데리아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고 함께 하영의 아빠 사고 표식을 지우며 안면을 튼다. 해원과 하영은 둘 다 밤잠이 없다는 공통점을 가진 것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둘은 ‘야행성’을 공유하며 학교 수업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동질감 덕분에 금방 가까운 사이가 된다. 이제 소년과 소녀는 자신들을 일상적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야행성의 원인 격인, 자기들 마음대로 행동하며 마구 민폐를 끼치는 어른들을 향해 응징을 결심하고 실천에 옮긴다.

◆ 집에서 소외된 청소년들의 사회적 불면증

<야행성>의 두 동갑내기 주인공은 그 또래에 어른들이 요구하는 입시와 진로에 대한 꿈과는 동떨어진 존재들이다. 학교에서 특별히 반항적이진 않지만, 제도권 교육은 그들에게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미래에 대한 목표를 설정하고 매진하기엔 자신들의 주변 상황이 집중력을 발휘할 동기도, 의지도 일깨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자기들로선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구조적 압박 때문에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소외감을 해결해보려 시도한다.

일단 공통적으로 아직 미성년자인 둘에게 가장 안정감을 줘야 할 ‘집’이란 공간은 마땅한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다. 해원과 하영에게 집은 안전과 안락함과는 거리가 멀다. 해원의 집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빠의 바람기로 인해 파탄 직전의 살얼음판이다. 심지어 하영의 집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두 ‘집’은 차가운 냉기가 감도는 안주할 수 없는 공간에 불과하다.

▲[사진=영화 ‘야행성’ 스틸 이미지]

그런 체험 때문에 둘은 동네 롯데리아가 오히려 편하다는 공감대를 갖는다. 실제로 새벽에 해원과 하영이 서로를 각인하기 시작한 만남도 롯데리아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다. 절대로 롯데리아는 둘에게 ‘집’의 역할을 대신해주지 못한다. 만인의 공유공간이자 기업의 이윤 추구가 주목적인 그곳에서 오직 찰나의 휴식을 취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온전한 자유와 안식을 얻지 못한 그들은 서로 만나기 전까지는 각자 고립된 채 무미건조한 시간 죽이기를 거듭했을 뿐이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둘만이 공유하는 소통과 이해의 유대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둘은 어른들을 향한 반격을 개시한다.

◆ 참으면 병이 될 응어리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쏟아내다

소년과 소녀는 감독의 연출 의도처럼 ‘참으면 병’이 되기 딱 좋을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제 둘은 스스로를 구하고 기나긴 불면의 밤을 끝내기 위해 더 이상 참지 않는다. 물론 혼자라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그들은 함께하기에 이룰 수 있었던 작은 승리감을 만끽한다. 더 굳게 결속시키는 건 해원의 엄마가 끓여둔 미역국으로 함께 먹는 ‘집밥’이다. 해원은 하영에게 함께 집밥 먹기를 권한다. 서로의 처지를 깊게 이해하고 공명하기에, 지금 하영에게 가장 절실한 게 무엇인지를 간파한 것이다. 별 반찬이 없지만,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 꽤 맛나 보인다.

그리고 둘은 뜬금없지만 그들의 전리품을 갖고 함께 영화를 본다. 도입부에 노래방 모니터로 해원은 프랑스 고전 누벨바그 영화를 보고 있었다. 해원의 거의 유일한 취미는 현실을 잊거나 혹은 돌아보는 통로로 활용하는 고전영화 감상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취미를 하영과 공유하고자 한다. 물론 실제 저 나이대 소년, 소녀가 프랑수아 트뤼포의 1959년 작품 <400번의 구타>를 작품 속에서처럼 함께 감상하기란 지극히 희소할 테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굳이 영화의 개연성을 일정부분 내려놓으면서까지 누벨바그 고전을 삽입한 걸까?

▲[사진=영화 ‘야행성’ 스틸 이미지]

<400번의 구타>는 거장 트뤼포 자신의 어릴 적 경험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주인공인 14살 소년 앙투안은 제도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채 사고뭉치로 찍힌, 소위 ‘문제아’다. 자식을 감싸줄 것이라 누구나 예상했을 앙투안의 부모도 그에게 냉정하기 그지없다. 결국 앙투안의 비행은 점점 도를 더해간다. 학교 수업을 무단으로 결석하길 밥 먹듯 하면서 거짓말을 입에 달고, 결국 가출청소년이 되어 절도행각을 벌이다 소년원에 끌려가는 결말을 맞는다.

아마 <야행성>을 만든 감독은 성장기 청소년들의 위태로운 현실을 <400번의 구타>와 연결해 시대를 뛰어넘는 상징으로 각인시키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감독의 의도 하에) 둘은 영화를 보고 (역시 모든 건 감독의 계획대로) 이내 처음으로 단잠에 빠진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 붙어 잠들어 있지만 어떤 성적인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어린 강아지나 새끼 고양이들이 서로 몸을 붙이고 포개어 의지하는 모양새와 닮았을 뿐이다.

◆ 위기의 10대 청소년을 다루는 독특한 변주의 결과물

▲[사진=영화 ‘야행성’ 스틸 이미지]

‘야행성’은 한창 성장해야 할 영화 속 주인공들에게 따라붙어서는 안 된다. 영화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밝은 햇살이 부드럽게 잠든 주인공들을 비춘다. 영화 내내 이들은 낮에는 학교에서 졸거나 교문을 타넘어 어디론가 방황하느라 헤매고 다닐 뿐이었다. 그렇게 잔인한 현실에서 출발하고 작품 속 주인공 둘이 처한 위기 상황을 충실히 재현해낸다. 하지만 참지 말고 속에 맺힌 걸 풀어야 한다는 감독의 제작 의도대로 둘은 스스로 나서 자기 자신을 구하려 도전한다. 그렇게 자신들의 달콤한 수면욕을 위한 적극적인 도전을 치르고 멋지게 성공한다. 위기의 청소년 문제를 다루는 작업 중에서 유독 현실에 천착하면서도 긍정 에너지가 돋보이는 결과물이다.

청소년 문제를 다룬 수많은 작품이 매년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극단적 현실에서 위기에 처한 10대들의 상황을 풀어내는 영화가 자주 극단적 현실을 나열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함정에 빠지곤 하는 실정에서 <야행성>이 선보이는 중용과 선을 넘지 않는 긍정은 청량한 뒷맛을 선사해준다. 하지만 이 작품을 ‘로컬 영화’ 혹은 ‘지역 영화’라 부르는 데에는 다소간의 망설임이 수반된다. 경북 영천을 배경으로 촬영이 이뤄졌고 감독 본인의 출신지도 대구경북지역이지만, 이 영화에서는 어떠한 지역 색채나 배경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본 작품이 대구단편영화제의 지역영화 카테고리인 ‘애플시네마’ 섹션으로 분류되고 주목받았던 점에 대해서는 영화가 선보인 흥미와 완성도와는 별개로 의문부호가 따라온다.

물론 <야행성>은 상당한 완성도를 가진 준수한 작품이다. 역설적으로 그게 문제다. 근래에 본 작을 비롯해 개별 완성도는 주목할 만하지만 ‘지역영화’ 기준을 모호하게 만드는 사례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는 중이다. 물론 영화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현재 각 지역의 독립영화 제작환경에서 지원제도나 영화제 상영작 분류 관련 주요 기준이라 할 ‘지역/로컬 영화’ 개념의 모호함 때문에 촉발되는 논란일 테다. 관련해서 독립영화의 ‘로컬리티/지역성’ 논의가 지금보다 한층 더 구체적 기준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작품정보>

야행성 The Nocturnal Kids
2022|한국|드라마|25‘44“
감독 박지수
주연 석찬(해원 역), 이경민(하영 역)
출연 민효경(희정 역), 진성찬(성원 역), 김사랑(정선 역), 심규식(담임 역),
윤진(노래방 손님 역)
배급 호우주의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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