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미투의 시작, ‘밤쉘: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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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대신 보답을 해야 된다. 너의 충성을 기대하겠다.” 승진을 보장하는 회사의 책임자. 대가로 ‘충성’을 요구한다. 거절하면 직장을 잃게 된다. 그렇다면 성폭력을 이겨낸 걸까? 충성하면 ‘합의에 의한 성관계’인 걸까? ‘본인의 선택’이라는 이유로 성폭력을 당했다고 주장할 자격이 없는 걸까?

4년 전 미국에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오랜 악습을 뒤집은 폭탄선언이 나왔다. 대표적인 보수 언론매체 설립자이자 공화당 킹메이커 ‘로저 에일스’에게 여성 피해자 23명이 성폭력을 당했다는 폭로였다. 폭스뉴스 앵커 그레천 칼슨은 2016년 6월 23일 해고되어 7월 6일 에일스를 성희롱 혐의로 고소했다. 이후 로저의 성폭력을 폭로한 여성 피해자는 폭스뉴스 간판앵커 메긴 켈리를 비롯해 22명으로 늘었다. 폭스뉴스를 미국 최대 방송사로 번성시킨 로저는 16일 만에 불명예 사퇴했다. 이들의 폭탄선언은 ‘미투(나도 고발한다)’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밤쉘:세상을 바꾼 폭탄선언(Bombshell)>은 당시 폭스뉴스를 배경으로 일어난 성추문 실화를 소재로 삼았다. 제작과 함께 주연을 맡은 배우 샤를리즈 테론은 실존 인물인 메긴 켈리를 연기했다. 폭로 이후 2017년 타임지가 선정한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 중 한 명으로 꼽힌 그레천 칼슨은 배우 니콜 키드먼이 맡았다. 배우 마고 로비는 전·현직 폭스뉴스 피해자를 토대로 만든 허구의 인물 케일라 포스피실을 연기했다.

밤쉘(Bombshell)은 폭탄처럼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닌 여성과 불쾌한 폭탄선언, 몹시 충격적인 일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샤를리즈 테론이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폭로되기 2개월 전인 2017년 8월 각본을 전해 받아 영화화가 결정됐다.

영화는 관객이 피해자의 감정에 동요할 수 있으면서도 속도감 있게 진행된다. 그레천 칼슨과 메긴 켈리, 케일라 포스피실을 중심으로 이들의 입체적인 면면을 뉴스 보도처럼 빠르게 보여주며 직장 내 역학관계를 세밀히 담아낸다. 이 과정이 밋밋하지 않은 이유는 방송국 내부의 제한된 공간에서 다양한 각도로 촬영된 영상을 빠르게 편집했기 때문이다. 화면은 인물들을 아주 가까이에서 비추거나, 때론 다큐멘터리처럼 거리를 두며 영화의 주제를 교직시킨다.

또 위계에 의한 성폭력이 얼마나 저열한지 과감하게 보여준다. 로저는 위력에 의한 추행을 저지른다. 그는 노출에 동의하는 출연자에게 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방송국 내에서 노출을 거부하지 못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자신의 명령을 거스르는 직원에게는 불이익을 준다. 최고 권력자 로저는 시청률을 내세워 여성의 외모를 품평하고, 짧은 치마를 입힌다. 그리고 드러난 다리를 화면에 담아낸다.

그의 전략대로 만들어진 뉴스는 인기를 끌고 매출을 끌어올린다. 로저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던 이유다. 야망을 가진 직원들은 로저의 요구를 거부할 수 없는 순명의 풍토 속에서 지낸다. 로저의 잇따른 성폭력에도 불구하고 폭스뉴스 내에서 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인물은 아무도 없다. 로저의 성희롱 의혹이 처음 세간에 알려졌을 때 폭스뉴스 내에서는 로저의 편에 서는 직원들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에 맞선 세 여성의 연대는 온도차가 있다. 그레천의 폭로로 로저의 스캔들이 미국을 뒤흔들지만, 폭스뉴스 내 여성들은 함부로 나서지 못한다. 폭로하는 순간 폭스뉴스에서 쫓겨나고 업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이다. 그레천은 지원군을 얻지 못해 낙담하다가 다른 이들의 폭로가 이어지면서 용기를 얻는다.

방송사 신입 케일라는 업무상 위계를 이겨내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동료 제스(케이트 맥키넌)에게 사실을 털어놓지만 외면을 당한다. 제스는 민주당과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는 레즈비언이지만 생계를 위해 정체성을 숨기고 폭스뉴스에서 일한다. 회장실에서 로저와 단둘이 있다가 나온 케일라가 울먹이며 제스에게 말을 걸자, 제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이러지 마.” 제스는 케일라의 고민을 들어주게 되면 로저의 표적이 될까 우려해, 케일라와 거리를 둔다.

메긴은 미묘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자신은 과거 로저에게 성추행을 당했지만, 자신이 폭스뉴스의 스타 앵커가 되는데 도운 것도 로저이기 때문이다. 메긴의 동료들은 메긴의 폭로는 메긴과 한 팀인 자신들의 직장을 잃게 만드는 것이라고 우려한다. 영화는 이 과정을 상세히 담는다.

“이제 와서 성희롱을 당한 사실을 밝히는 이유는 뭔가?”, “로저의 업적을 깎아내리려는 공작 아니냐?”, “돈 뜯어내려는 수작 아니냐?”, “성폭력이 아니라 불륜 아니냐?” 여성 피해자의 성폭력이 알려질 때면 늘 따라붙는 왜곡된 시선으로 2차 가해를 당하는 피해자의 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영화는 묻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생계가 걸린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외롭게 저항할 것인가?

영화에 대한 반응은 냉철하고 세련된 실화라는 호평과 주제를 깊이 파고들지 못한 평평한 영화라는 비판으로 엇갈린다. 또 실존 인물 메긴의 인종차별적 발언 때문에 논란이 일기도 한다. 메긴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여성 비하 발언을 놓고 설전을 벌여 영웅으로 떠올랐지만, 사실 그는 수차례 인종차별적 발언으로 논란을 낳았다. 메긴에게 트럼프 대통령의 여성 비하를 운운할 자격이 있느냐는 것이다.

영화의 각본은 2007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촉발된 미국 경제 위기를 풍자한 <빅쇼트(2015년)>의 작가 찰스 랜돌프가 맡았다. <밤쉘>은 올해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주연상과 조연상 후보에 올랐고, 분장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