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공화당 vs 민주당 양극단을 향한 고어한 풍자, ‘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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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도 모르고 어딘가로 끌려가는 12명의 남녀. 입에 재갈이 물린 채 숲속에서 깨어난다. 두려움에 떨던 이들은 들판으로 향한다. 들판 한복판에는 수상해 보이는 나무상자가 있다. 이 안에는 돼지 한 마리와 총과 칼 등 온갖 무기가 진열되어 있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상황. 누군가 열쇠를 찾아 재갈을 풀고 무기도 꺼내 가지는 찰나, 누군가 총에 맞아 사망한다. 사람들은 반격도 하지 못하고 총탄에 맞아 쓰러진다. 한 남성은 총알이 빗발치는 쪽을 향해 양손에 든 돌격소총을 쏴대다가 숨진다. 또 다른 남성은 총에 맞은 여성을 구하려다 지뢰를 밟아 목숨을 잃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남녀 3명은 철조망을 넘어 몸을 숨길 수 있는 주유소에 들어선다. 겨우 숨을 돌린 이들은 주유소 주인 부부를 겁박하고 경찰에 신고하던 도중 이들 부부에게 살해당한다. 부부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태연하다. 가게 안에서 의미심장한 내용의 무전이 흘러나온다. “스노우볼(Snow ball)이 5분 내로 도착합니다. 무장을 안 했으니, 재미있게 즐기세요.”

미국의 호러영화 전문 제작사 블룸하우스 프로덕션에서 내놓은 <헌트>는 아무런 정보 없이 시작한다. 사는 곳이 각각 다른 이들이 왜 낯선 곳에 끌려와 인간사냥을 당하게 됐는지 의문투성이다. 러닝타임 초반 30여 분 동안 살육이 벌어진 뒤에야 주인공 크리스탈(베티 길핀)이 등장한다. 그는 무전에서 알려준 스노우볼이다. 주인공일 거라고 생각했던 엠마 로버츠와 저스틴 하틀리 등은 목숨을 잃은 지 오래다.

전직 군인 크리스탈은 주인 부부의 거짓말을 알아채고, 그들을 살해한 뒤 인간사냥을 벌인 원흉을 처단하러 떠난다. 이 과정에서 각종 가짜뉴스와 음모론에 빠져 사는 개리(에단 서플리)와 동행한다. 개리는 함정에 빠져 목숨을 잃지만, 크리스탈은 발 빠른 대처로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이들이 파놓은 덫을 피해 반격한다. 마침내 사냥꾼들의 리더 아테나(힐러리 스웽크)와 마주한 크리스탈은 처절한 사투를 벌이고, 영문 모를 살육의 원인을 알아낸다.

살육의 단초는 SNS에서 비롯된 비방이다. 1년 전, 문자메시지로 시작된 음모론으로 인해 아테나를 비롯한 기득권은 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면서 온라인에서 무고한 살인을 저지른다는 소문이 퍼진다. 4개월 뒤 소문으로 직장을 잃거나 피해를 본 이들은 특정 지역의 사람들에게 점수를 매겨 살인을 계획한다. 음모론의 앙갚음으로 악플을 단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을 납치해 학살한 것이다. 하지만 크리스탈이 동명이인인 것을 미뤄, 납치된 이들이 악플을 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의 우화 <동물농장>을 직접 언급한다. 크리스탈을 지칭하는 스노우볼은 <동물농장>에서 권력 투쟁으로 모함을 당해 권력에서 쫓겨나 비참한 최후를 맞는 스노우볼을 뜻한다. <동물농장>은 공산주의의 모순점을 풍자하는 내용인 탓에, 우리나라에서는 반공 소설로 오랫동안 읽혀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공산군으로 참전한 골수까지 사회주의자다. 부랑자 생활을 직접 체험하고 탄광촌을 누볐다. 스페인 내전 당시 스탈린주의자들과 친소 세력의 모략으로 숙청의 위기에서 겨우 탈출했다. 그는 평생 ‘비판적 개인’이자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사회주의를 옹호하고 행동했다.

<헌트>는 지난해 9월 27일에 개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3일과 4일 미국 텍사스주 엘파소와 오하이오주 데이턴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에 대한 추도의 의미로 북미 개봉을 취소했다. 공식적 개봉 취소 이유이지만, 트윗으로 이 영화를 비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탓으로 해석하는 이들이 많다.

‘진보적 할리우드는 엄청난 분노와 증오에 찬 최고 수준의 인종차별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엘리트라고 부르기 좋아하지만, 그들은 엘리트가 아니다. (곧) 나올 영화는 혼란을 일으키고 불붙이기 위해 만든 것.’ 트럼프 대통령이 <헌트>가 당초 개봉할 즈음 날린 트윗이다. <헌트>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맥락상 <헌트>를 향한 것으로 보인다. <헌트>는 올해 3월 북미에서 개봉하고 4월에는 한국에서도 개봉했다.

<헌트>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그런데 평론가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영화는 54%의 로튼토마토 지수(평점:5.77/10)을 기록했다. 로튼팝콘 지수는 66%(평점 3.5/5)다. 불호의 이유는 정치적인 것보다 영화의 만듦새를 지적한다. 그런데 정치역학적 풍자의 관점으로 보면 시사하는 바가 꽤 그럴싸하다.

<헌트>는 정치풍자와 사회 기득권의 선민의식, 인종차별, 젠더 갈등, 종교 갈등, 난민 수용, 빈부격차, 총기규제, 멸종 위기 동물 사냥, 황색언론의 왜곡보도, 가짜뉴스 등의 문제를 담은 슬래셔 영화다. <헌트>의 원제는 <레드 스테이트(공화당 지지 주(州)) 대 블루 스테이트(민주당 지지 주)>였다. 미국에 뿌리 깊게 내린 공화당과 민주당의 거대 양당 대결로 주제를 직접적으로 드러낸 원제에서 고어틱한 액션과 장르적 요소로 선회했다. 각종 이슈들이 정당의 진영 대결로 남용되는 상황을 꼬집는다. 분열된 미국의 사회상을 풍자한 것이다.

양당제가 고착화된 탓에 어떤 이슈든 거대 양당의 정치 논리로만 구분되는 현실은 낯설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도 거대 양당이 첨예한 대립을 벌일 때면 진영 논리에 휩쓸려, 서로 힐난하는 데 급급하다. 거대 양당의 정치 논리에 벗어나면 가차 없는 퇴출 공격이 쏟아진다. 논쟁 없이 논란만 커지고, 확인되지 않는 의혹이 산처럼 쌓여갈 때 벌어지는 쉽고 빠른 ‘편 가르기’다. 동류의식에 빠져, 나만, 우리만 옳다고 외쳐 대서는 갈등만 번질 뿐이다.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된 조지 오웰이 아직도 기억되는 이유는 그의 글이 위대해서만은 아니다. 그가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를 모두 권위주의라는 이유로 거부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무엇보다도 중시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조지 오웰이 근무한 BBC 방송국은 2016년 조지 오웰의 동상을 세우면서 그의 말을 새겼다. “만약 자유에 의미가 있다면, 자유란 사람들이 듣고 싶지 않은 사실을 알릴 권리를 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