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선우] 특별하지 않은 배경 속 로망 ‘노팅 힐’

17:11
Voiced by Amazon Polly

웨스트 런던의 노팅 힐에 사는 윌리엄 태커(휴 그랜트)는 이혼남이다. 전처는 배우 해리슨 포드를 닮은 남자와 눈이 맞아 도망갔다. 윌리엄은 방송인 노홍철을 닮은 괴상한 친구 스파이크(리스 이판)와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무미건조한 일상을 보낸다. 이혼한 뒤 미래에 대한 포부나 설계를 사치처럼 여겨서다.
그런데 톱스타 애나 스콧(줄리아 로버츠)이 노팅 힐 시장 한쪽 구석에서 윌리엄이 운영하는 작은 여행서적 전문서점에 들르면서 무료한 일상에 파문이 인다. 서점에서 나간 애나는 오렌지주스를 사들고 다시 서점으로 향하는 윌리엄과 노팅 힐 모퉁이에서 부딪힌다. 오렌지주스가 애나의 셔츠에 쏟아지고 애나는 서점에서 멀지 않은 윌리엄의 집에서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데 애나는 돌연 윌리엄에 키스하고 윌리엄은 이를 잊지 못한다.

▲[사진=영화 노팅힐]

며칠 뒤 애나는 호텔로 윌리엄을 초대한다. 마침 애나는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애나의 매니저는 윌리엄을 기자로 오해한다. 윌리엄은 기자인 척 엉뚱한 질문을 던지고 애나는 웃음을 터트린다. 그리고 둘은 매니저의 눈을 피해 윌리엄의 여동생 허니(엠마 챔버스)의 생일 파티에 간다. 톱스타와 일반인의 첫 데이트다. 윌리엄의 친구 스파이크와 맥스(팀 멕네니, 벨라(지나 맥키), 버니(휴 보네빌)는 애나를 못 알아보다가 톱배우 애나 스콧라는 것을 깨닫고 함성을 내지른다. 애나는 윌리엄과 윌리엄의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 윌리엄과 거리를 걷는다. 그리고 애나는 윌리엄을 자신이 묵는 호텔로 데려간다.

하지만 방에는 미국에서 갑자기 찾아온 애나의 남자친구 제프(알렉 볼드윈)가 기다린다. 애나는 당황하고 윌리엄은 애나를 배려해 자신이 룸서비스 직원이라고 얼버무린 후 호텔을 나온다. 윌리엄은 실연했지만 애나를 잊을 수가 없다. 전광판과 신문, 잡지에 온통 애나의 얼굴이 실려 있어서다.

마음을 다친 윌리엄은 침울한 표정으로 런던 시내의 포토벨로마켓을 걷는다. 반년 뒤 애나가 윌리엄의 집 파란색 대문을 두드린다. 전날에는 모든 신문에 애나가 무명시절 찍은 누드 사진이 대서특필된다. 윌리엄은 누드사진 논란이 잠잠해질 때까지 그녀를 자신의 집에서 지내도록 배려한다. 하지만 스파이크가 술에 취해 떠드는 바람에 윌리엄의 집에 애나가 머문다는 소문이 퍼진다. 다음날 아침, 속옷 차림으로 문을 연 윌리엄의 앞에 기자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윌리엄이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에 일을 꾸몄다고 오해한 애나는 화를 쏟아내고 떠나 버린다.

상심한 윌리엄의 뒤로 계절이 바뀐다. 시간이 지나도 애나를 잊지 못한 그는 애나가 영화 촬영차 영국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윌리엄은 영화 촬영장으로 찾아가고 오해가 풀리길 기다린다. 하지만 애나가 동료 배우에게 윌리엄과의 관계가 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것을 엿듣는다. 애나를 잊기로 마음먹은 윌리엄은 자리를 떠나고, 애나는 윌리엄을 찾아 오해를 설명하고 자신이 윌리엄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윌리엄은 현실적 조건 차이를 극복할 자신이 없다며 거절한다.

이후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애나를 떠나보낸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은 윌리엄은 영국에서 기자회견을 하는 애나를 찾아간다. 기자들 사이에서 사랑을 다시 확인한 윌리엄과 애나는 서로 마주본다. 얼굴에는 찬연(燦然)한 웃음이 번진다. 기자들이 경쟁하듯이 플래시를 떠트린다.

톱스타와 일반인의 연애는 진부한 설정이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유명인과 일반인의 운명적인 만남을 소재로 삼았다.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보는 상상이지만 그럴 일은 거의 없는 탓에 로망이 된 건지 모른다. 이제는 식상한 소재가 됐지만 유명스타와 일반인의 멜로라는 신드롬을 낳은 기념비적인 영화는 <노팅 힐(1999년)>이다. 영국의 멜로전문 배우 휴 그랜트와 미국 할리우드의 슈퍼스타 줄리아 로버츠가 주연을 맡았다.

영화의 배경인 노팅 힐은 특별하지 않다. 포토벨로 마켓은 노팅 힐 게이트역부터 약 2㎞ 구간에 걸쳐 있으며, 길거리를 따라 노점상이 즐비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이가 빠진 사기그릇부터 키치풍의 패션 소품이나 낡은 악기, 골동품 카메라, 앤티크 제품, 빛이 바래 더욱 멋이 나는 가죽 제품 등 다채로운 물건들이 전시된다. 이 광경은 전 세계 어디서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런데 연극과 같은 독특한 연출로 평범한 거리는 사계절이 바뀌는 이색 공간이 된다. 영화의 흥행으로 포토벨로 마켓과 서점과 파란 대문 집은 늘 관광객들로 붐빈다.

영화 속에는 ‘영국식 유머(British Humour)’가 가득하다. 자기 자신까지도 농담의 대상으로 삼는 블랙유머다. 주로 배우 휴 그랜트와 주변인이 스스로 희생해 웃기는 방식이다. 윌리엄이 기자를 사칭할 때 소속 언론사를 <말과 사냥개>로 밝히거나 달랑 삼각팬티 하나 입고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어대는 기자들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스파이크가 대표적이다. 감미로운 선율과 목소리가 인상적인 영국 싱어송라이터 엘비스 코스텔로의 <쉬(She, 1999년)>도 매력적이다. “요즘 볼 게 없다”는 말만 하지 말고 이런 고전영화를 다시 보는 건 어떨까?